▲“평화가 미래다. 미래로 나아가는 우리.” 동두천 낙검자 수용소(성병관리소) 철거 반대 천막 농성, 2025.11.1. 농성 431째날.
윤보영
2. 경계에 서 있던 사람
그는 카투사였다. 1971년 10월 15일 입소해 육군훈련소 6주, 카투사 신병교육대 2주 교육을 받고, 1972년 1월부터 1974년 7월까지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력(카투사)으로 복무했다. 초기에는 김포 오쇠리의 단위경찰(Unit Police), 김포공항 안전경찰(Security Police)로 근무했다가, 이후 카투사 20명과 미군 25명이 선발되어 헌병(Military Police)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은 부대 출입 통제, 규율 위반 예방과 처벌, 민간인과 군인 간 사건 조정, 증거 보존과 보고 절차, 그리고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적용 방식이었다.
그는 45명 졸업생 중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용산 제142 헌병중대에서 선임하사(N.C.O.I.C.)로 근무하며 선임하사로서 부대 질서와 치안을 관리했다. 카투사도 헌병이었기 때문에 권한에 차이는 없었다. 그의 역할은 누군가를 직접 체포하거나 처벌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통제하고, 분쟁이 커지지 않도록 조정하며, 민간인의 출입을 관리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늘 '문턱'에 서 있었다.
그의 위치는 복합적인 경계 위에 놓여 있었다. 한국 영토 안이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국가의 경계, 한국법과 미군 군법이 충돌하거나 교차하는 법의 경계, 기지 안과 기지 밖을 나누는 공간의 경계, 군인과 민간인, 미군과 카투사, 그리고 기지촌 여성이 교차하는 신분의 경계. 그는 사건의 중심에 서기보다는, 사건이 발생하고 처리되는 통로에 서 있었다.
이 위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많은 폭력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폭력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무엇이 문제로 간주되고 무엇이 문제로 간주되지 않는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다. 그의 기억은 개인적 체험이면서 동시에 구조에 대한 증언이었다.
3. 클럽이라는 통제의 공간
그가 처음 본 미군 '위안부'는 카투사 교육이 끝난 뒤 처음으로 부대 밖에 나간 저녁이었다. 정문 앞에는 한국인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화장과 차림새의 여성들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그는 그 장면을 "별일도 다 있네"라고 기억한다. 여성들은 부대 안 하사관 클럽(NCO Club)으로 향했다.
하사관 클럽(NCO Club)은 부대 안에 있었지만, 완전히 군사 공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장소였다. 일과가 끝난 저녁 6시에 문을 열었고, 하사관들이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사교하는 공간이었다. 장교 클럽(O-Club)에 비해 통제가 느슨했고, 사적인 관계가 더 자유롭게 오갔다. 이곳은 공식적인 규율이 작동하는 군사 공간과, 비공식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사적 공간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대대마다 두 명씩 배치된 MA(Master Arms)는 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관리했다. 그들은 정문에서 여성을 인솔해 부대 안으로 들였고, 여성들은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인적 사항을 기록했다. 출입은 '허용'된 것이었지만, 동시에 '관리'의 대상이었다. 이 절차는 자발성과 통제, 자유와 감시가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클럽 안에 여성들이 줄지어 앉아 있으면, 미군이 다가와 그중 한 사람을 선택했다. 술을 마시고, 이후 부대 밖으로 나가거나, 중사 이상인 경우에는 개인 숙소로 함께 가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암묵적인 규칙 속에서 반복되었고, 큰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4. 비즈니스라는 언어
미군은 이 여성들을 "비즈니스 우먼"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표현을 비판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나 이 명칭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비즈니스'라는 말은 관계를 거래로 정리한다. 거래는 합의와 선택의 이미지를 불러오고, 그 결과 강제와 불평등의 구조는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 언어는 미군에게 편리했다. 폭력은 예외적인 사건이 되고, 일상은 합의된 거래로 정리된다. 동시에 이 언어는 국가에게도 유용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은 '사적 관계의 문제'로 축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과 국가는 이 언어를 통해 책임에서 한발 물러설 수 있었다.
그는 이 여성들 중 일부가 미군과 동거했다고 말했다. 지휘관 회의에서 "보통 교사 월급이 얼마냐", "상사 월급이 얼마냐"는 질문이 오갔고, 동거하는 여성에게 얼마를 주는 것이 적절한지 논의되었다. 결국 일정 금액이 제시되었다. 여기서 여성은 인격체가 아니라, 질서 유지를 위한 변수였다. 얼마를 지급해야 문제가 줄어드는지, 어느 선에서 통제가 가능한지가 논의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착취의 방임이 아니라, 착취의 관리였다.
5. 싸움이 되지 않는 싸움
여성들과 미군 사이의 분쟁은 빈번했다. 약속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 폭행, 관계의 파기 등 다양한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싸울 수 없었다. 미군과 크게 다투면 부대 출입이 금지되었고, 이는 곧 생계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국 경찰에게 호소하는 선택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멸시만 당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당시 여성들이 처한 법적·사회적 위치를 정확히 보여준다. 법은 존재했지만, 그 법은 이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집단 성폭행과 같은 중범죄도 있었다. 장교 클럽에서 여러 명의 미군이 한 여성에게 저지른 사건이 있었고, 그 처리 방식은 가해자들에게서 돈을 걷어 피해자에게 주는 것이었다. 법적 처벌은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 장면은 무법 상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법과 질서가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문제는 처벌의 부재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로 정의되었는가이다. 폭력은 도덕적·법적 문제라기보다, 질서를 위협하는 변수로 취급되었다. 해결이란 다시 조용해지는 것이었고, 정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6. '천국'이라는 말의 이면
이 시기 한미 관계는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유지되었지만, 실제로는 한국 정부가 미군의 판단과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비대칭적 관계였다. 1970년 닉슨 행정부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따라 해외 주둔 미군 감축을 추진했고, 그 일환으로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를 결정했다.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보에 접근하려 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책임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물은 미군 1개 사단 철수 결정 이후, 실제 철수 일정과 명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봐달라고 요청하며 주변을 통해 압력을 행사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부대 안에서 유도 교육을 하던 인물이 고급 한정식을 대접하며 자신을 중앙정보부 요원이라 밝히고, 후배가 해당 부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다. 이는 한국 정부와 그 하위 기관들이 공식적 외교·군사 채널이 아닌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미군의 내부 정보에 접근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미군 역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시내 정찰에 나서면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탱크가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청 앞 신민당사에는 장갑차가 주둔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확인하는 미군 헌병 차량이 이동할 때, 한국 경찰은 신속한 통과를 돕는 방식으로 협조했다. 그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한국 정부가 주권 국가로서 동맹국을 '관리'하기보다는, 동맹국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과는 별개로, 그의 기억 속에서 한국은 많은 미군에게 '천국'처럼 경험되었다. 미군 병사들은 한국 여성을 반복적으로 이상화하며 호의적으로 평가했고, 그는 "미군 열 명 중 아홉은 여성과 어울렸다"는 당시의 통념을 전한다. 일상은 잦은 술자리와 오락으로 채워졌고, 미군의 복무 경험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풍요로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사관 클럽에서는 두 달마다 공연 밴드가 교체되었고, 패티 김을 포함한 당대의 유명 가수들이 초청되어 노래와 연주를 선보였다. 부대 내부에는 영화관이 마련되어 있어 미군들은 상영되는 영화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물질적 환경은 전시나 분쟁 지역에 파병된 군인의 경험과는 현저히 다른 복무 조건을 형성했다.
그는 헌병으로 근무했던 미군이 제대 후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과 관련해 증언을 위해 일시적으로 한국에 소환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들 역시 짧은 체류 기간 동안 여성들과 어울리며 밤낮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장면들은 주한미군의 복무 환경이 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오락과 소비가 풍부한 공간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기지촌 여성의 존재 역시 일상의 일부로 정상화되었다.

▲동두천 보산동관광특구 주한미군 2사단 캠프 케이시 기지. 2025.11.1.
윤보영
7. 교육이라는 완충장치
그가 원주에서 근무한 마지막 6개월은 이전의 헌병 업무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는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 교육'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이 사무실은 미군의 알코올 및 마약 문제를 상담하고, 흑백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이나 지역 사회와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교육은 미군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지역 사회의 기관에서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교육의 대상에는 기지촌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이 부르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비즈니스 우먼"이었다. 그는 이 교육이 인간관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했다. 근무하는 동안 총 여덟 차례, 한 번에 약 서른 명 규모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교육이 그가 오기 전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교육의 내용은 단순했다. 미군과의 관계에서 폭력이나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 묻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한국 경찰에 가기 전에 미 헌병에게 먼저 오라는 것이었다. 미 헌병을 통해 지휘 계통으로 올리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겠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동시에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른 공식적인 기소나 보상 절차는 매우 어렵다는 점도 분명히 전달되었다. 미군 소령이 설명하면 그는 통역을 맡았다.
이 교육은 표면적으로 보면 '권리 안내'에 가까웠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보면, 이는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라기보다 분쟁을 사전에 흡수하고 관리하기 위한 완충 장치였다. 교육은 폭력이 발생한 이후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폭력이 문제로 비화되기 이전에 '통로'를 지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 통로는 한국 경찰이 아니라 미군 헌병이었다.
그는 교육에 참여한 여성들이 수동적이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여성들 사이에는 나름의 조직이 있었고, 그중 나이가 많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구조 자체를 흔들기보다는, 구조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교육은 보호의 제도라기보다, 질서 유지의 기술로 기능했다. 폭력을 예방한다는 명목 아래, 폭력이 법적·정치적 문제로 전환되는 가능성은 차단되었다. 교육은 국가가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결과를 관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의료가 몸을 통제했다면, 교육은 말과 선택을 통제했다. 이 둘은 분리된 제도가 아니었다. 교육을 통해 분쟁은 사전에 흡수되었고, 흡수되지 않은 문제는 의료와 격리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기지촌 여성의 몸과 말은 각각 다른 제도를 통해 관리되었다.

▲인간관계 교육 1974년 원주 Camp Long 주변의 미군 전용 클럽. 인간관계 교육 강의 미군 소령(백인), 미군 중사(흑인), 통역 인터뷰이. (사진 인터뷰이 제공)
윤보영
8. 의료라는 이름의 통치
의료는 가장 정교한 통치 장치였다. 부대 밖에는 '석바위'로 불리던 성병관리소가 있었다. 이곳의 운영 방식은 명확했다. 시설과 의료 장비, 약품은 미군이 제공했고, 의료 행위는 한국인 의료진이 담당했으며, 운영과 통제는 한국 경찰이 맡았다. 자원은 미국이 공급하고, 집행과 책임은 한국 국가가 부담하는 분업 구조였다.
야전병원에서 약을 지급하던 의무병의 증언에 따르면, 치료에 사용된 약물은 부작용이 심해 기지 내에서 1:1 관계로 관리되던 여성이나 '하우스피'로 분류된 여성들이 주사를 맞은 뒤 정상적으로 걷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치료는 회복을 위한 권리가 아니라, 이동과 관계를 제한하기 위한 조건으로 작동했다. 성병이 완치되기 전까지 여성은 기지와 도시, 사회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의료 체계는 표면적으로는 공중보건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기지 운영의 안정과 미군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의료의 목적은 여성의 건강이 아니라, 미군의 전투력과 질서 유지였다. 여성은 환자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었고, 치료는 보호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로 수행되었다.
'석바위'는 치료 시설이기 이전에 경계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여성은 사회적 시민이 아니라, 기지 체제 안에서 격리·관리되는 존재가 되었다. 미국은 자원을 제공했고, 한국은 집행을 담당했다. 그 결과 책임은 분산되었고, 피해는 한곳에 고였다. 의료는 폭력을 은폐하는 가장 효과적인 행정 언어였다.
9. 국력의 격차, 국가의 선택
그는 군 복무 기간 동안 미국과 한국의 국력 차이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카투사 이등이 받던 급여(월급)는 600원이었고, 미군 이등병은 13만 원을 받았다. 미군은 왜 한국은 아들들을 이렇게 대우하느냐며 의아해했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징집이 있었지만, 합리적인 급여와 제대 후 학비 지원이 제공되었다. 군인에 대한 예우가 국가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였다.
국력의 차이는 숫자로만 체감되지 않았다. 그는 김포공항에서 미군 사령관을 맞이하던 날을 기억했다. 미군은 포드 LTD와 갤럭시 500 같은 대형 세단을 타고 왔고, 한국의 고위 장성은 소형 세단을 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한국 대통령은 미군에게 담배 한 갑씩을 선물했고, 미군은 그것을 발로 차며 놀았다.
이 격차는 기지촌 여성의 처우로 직접 연결되었다. 가난은 조건이었지만, 그 조건 속에서 무엇을 보호할지는 선택의 문제였다. 한국 정부가 선택해 보호한 것은 미군의 건강권, 기지 운영의 안정, 미군과의 마찰 최소화, 그리고 국제 문제로 비화되지 않는 질서였다. 선택되지 않은 것은 여성의 권리와 보호였다.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전 체제 속에서 안보와 동맹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국가의 판단이었다. 그 판단의 비용은 여성의 몸 위에 누적되었다.
10. 결론: 경계에서 본 국가의 얼굴
그는 미군을 악마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본 구조를 말했을 뿐이다. 그가 서 있었던 자리는 폭력의 현장이 아니라, 폭력이 관리되는 경계였다. 그 경계에서 누가 보호받고, 누가 보호받지 못하는지가 결정되었다.
미군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일탈이나 일부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버렸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의료, 치안, 언어, 협정은 모두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폭력이 문제로 드러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기술로 작동했다.
2025년 제기된 소송은 과거의 책임을 묻는 동시에, 현재의 국가에게 질문을 던진다. 국가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침묵과 관리의 언어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책임과 권리의 언어로 전환할 것인가.
이 글은 1970년대 초 카투사로 군 복무한 한 사람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간, 다른 지역에서 근무한 사람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한 카투사 헌병의 기억을 통해 그 선택의 구조를 드러내고자 했다. 경계에서 본 국가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경계에 서 있었던 기억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묻는 증언으로 남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4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북한의 군중문화: 예술선전대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북한이탈주민의 탈경계적 실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북한사회에 집중해 놀이, 뇌물, 소비문화, 북한의 노동자가 경제적 삶을 어떻게 꾸려가는지 연구하고 있다. 동국대 강사, 한국여성평화연구원 원장.
공유하기
어느 카투사의 증언... 미군들은 왜 한국을 '천국'으로 여겼나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