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희의 <파치> 책 표지 이미지
교보문고
파치이기를 거부하자 시작된 해방
비정규직 노동자를 파치(깨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로 취급하는 곳에서 노조를 만들자, 공장이 해방공간이 됐다. 동료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아갔다. 조회 시간을 노조 회의시간으로 바꿔 다 같이 구호를 외쳤다. 잔소리하던 관리자가 없어졌다. 정규직은 전부 숨어버렸다. 꼭 우리만 있는 것 같았다.
지게차는 다녀도 비정규직 노동자는 다닐 수 없던 공장 안 큰길을 두 팔 휘저으며 걸었다.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빨간 머리띠를 매고 일했다. 정규직만 이용하던 구내식당에 보란 듯 들어가 밥을 먹었다. 생산 속도를 낮추기 위해 노동자 스스로 10% 물량을 줄였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통제를 부수고 싶어졌다. "공장은 우리를 경쟁하게 하지만, 노동조합은 우리를 협력하게" 했다.
현장에서의 노조 활동도 잠시,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불법파견과 집단해고에 맞서 9년을 거리에서 싸웠다. 긴 시간이었다. 2017년 봄에는 투쟁 사업장들과 광화문 고공농성을 함께했다.
2018년에는 "공투 없이 아사히지회가 봄부터 겨울까지 그냥" 싸웠다. 검찰이 불법파견 자료를 캐비닛에 쌓아두기만 하고 기소하지 않자 "잡혀가는 게 오히려 좋은"거라며 "깔끔하고 고민없이" 대검찰청 로비를 점거했다.
생계팀 조합원들은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이면 농성장을 지켰다. 명절에는 김을 팔았다. CMS 후원자들이 있었지만, 조합원에게 돌아가는 생계비는 월 100만 원이었다. 시간은 아사히글라스 편이었다. 조합원들에게 한 가지만 묻는다면 "괜찮냐고 묻고 싶다"는 차헌호의 대답은 괜찮지 않았다.
바로 지금이 해방을 노래할 때
그냥 싸우기도, 같이 싸우기도, 괜찮기도, 괜찮지 않기도 했지만, 민주노조 깃발 들고 공장에 돌아가는 꿈을 놓지 않았다. 2024년 여름,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노조 깃발을 높이 세우고 다 같이 복직했다. 혼자 한 싸움이 아니었다. 아무 대가 없이 노조 설립부터 함께해준 KEC지회가 있었고, 매주 일본 아사히글라스 본사 선전전을 해준 이들이 있었다.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준 연대자들, 9년 투쟁 동안 생계비를 함께 책임져준 후원자들, "합법 파견은 없다"며 함께 싸운 법률가들도 있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살벌한 세상"이었기에 "해고되면 더 살벌하게 살게 될 줄 알았는데" 투쟁과정도 해방이었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서 "날마다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 스스로 "남 일을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곁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됐다.
투쟁은 조합원들에게 "세상을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크게 바라보는 밝은 눈"을 갖게 해줬다. 해방은 멀리 있지 않았다. 노조를 세운 공장에,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투쟁에 있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에서 비정규직 네 글자를 뗀 건 해방의 결과였다.
오랫동안 나는 해방을 외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세계라든가, 비정규직·여성·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태. 아사히글라스지회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해방은 지금 여기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파치들이 "우리를 차별하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며 자신들의 존엄을 위해 싸울 때 해방공간이 열렸으니까.
"공장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장소이자 계급의 무대인데, 노동자는 인간다움을 지키려면 자본에 대항할 무기가 필요하다. 노동자 계급의 무기가 노동조합이라면 자본가는 이 노동조합을 결단코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노동조합을 만드는 이야기는 결코 가벼울 수 없고, 짧을 수도 없으며, 한 청년 노동자가 인생을 걸어야 할만큼 거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파치들의 해방일지, 장기투쟁사업장의 전사(前史), 한 기록노동자의 사랑 이야기, <파치>. 이 이야기가 왜 가벼울 수도, 짧을 수도 없는 거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지, 해방은 어디에 있는지, 당신도 읽어보길 권한다.
파치 -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쓰다
소희 (지은이),
이매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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