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집 독서
이인자
시의 숲에 머무는 동안, 윤동주의 시를 낯선 시 대하듯 읽었다. 이상하게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시가 아닌 '순이'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마음이 아려왔다. 윤동주의 시에서 '순이'가 등장하는 작품은 '사랑의 전당', '소년', '눈 오는 지도' 세 편이다. 청춘이었던 그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고백조차 못 해본 것 같아, 그의 큰누이라도 된 듯 안타까운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 '눈 오는 지도' 중
모두의 아름다운 시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의 생애도 떠올렸다. 어쩌면 시를 쓰던 시절이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스무 살에 시를 쓰기 시작한 나 역시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풋풋했던 대학교 1학년, 나는 금세 사랑에 빠지는 이른바 금사빠였다. 멋진 이성만 보면 혼자만의 감정을 구겼다, 버렸다, 감추었다, 다시 곱게 펴며 시를 썼다. 시로 쏟아내고 나면 부끄러워 몇 개의 단어를 빼거나 보탰다. 그 시절, 시를 쓰게 해 준 팔 할의 감정은 바로 그런 짝사랑이었다.
1층에서는 '아름다운 시절, 꽃잎처럼 흩어져'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은평구 치매안심센터와 도서관이 함께한 예술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르신들의 창작 전시였다. 고향의 소리와 자연을 노래한 시와 노랫말에 영감을 받아, 어르신들이 예술로 풀어낸 작품들이었다. 100% 창작물은 아닐지라도, 젊고 청청했던 시절이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로 되살아나 있었다. 흐릿하고 뭉글뭉글 지워진 그리움이 아니라, 또렷하고 선명한 그리움이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치매와 암으로 요양병원에서 3년을 보내셨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끝까지 집에서 모시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까운 요양병원에 모셨기에 거의 매일 잠깐이라도 들렀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기억이 사라졌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던 시기였다. 그때, 시어머니가 내게 건넨 말속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오빠 친구'가 동네에 산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시어머니는 자신을 20대 초반 아가씨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짓궂은 며느리였던 나는 절절한 로맨스를 기대하면서 캐물었지만 큰 사건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오빠 친구가…'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표정은 사춘기 소녀처럼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결혼 이후 고단했던 시어머니의 생애를 알고 있으니, 그때가 시어머니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으리라.
도서관은 건축 설계도 독특했다. 숲을 깎아 만든 건물이 아니라, 마을과 숲을 도서관이 이어주는 느낌이었다. 회색 콘크리트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나 역시 도서관을 지나 숲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와아…' 하는 숨이 새어 나왔다. 끝나지 않은 가을이 나무들 사이에서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끝난 줄 알았던 단풍이 여전히 붉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청춘의 윤동주,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그의 시, 전시장에서 마주한 어르신들의 작품들, 시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수줍은 고백까지. 서로 다른 아름다운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누구에게나 한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고, 그 시절은 사라진 듯해도 이렇게 다른 형태로 이어져 존재한다는 사실을 십일월의 마지막 날, 여전히 붉게 물든 단풍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11월 마지막 날 단풍 아름다운 시절
이인자
우리는 매일 새로운 길을 걷는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간, 집으로 돌아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를 건너지는 않았다. 낮술에 취한 어르신, 자전거를 타는 동네 아이들, 골목길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풍경들을 헤치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때 윤동주 시의 '새로운 길' 이 다시 떠올랐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새로운 길'이 반드시 새로운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매일 이 낯익은 길을 새로운 길처럼 걷고 있다. 내 삶의 작은 강을 건너고, 한 겹의 숲을 지나며, 누군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포개지는 이 순간, 이 순간이야말로 오늘 내가 느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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