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교육감 시대 10여 년, 학생인권조례와 민주시민 교육은 학교 현장의 대표적인 성과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최근 교육계의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거창한 구호와 정책은 넘쳐났지만, 학교 안에서 민주주의를 '살아보는 경험'은 줄었다는 뼈아픈 지적이 이어진다.
특히 학생 자치의 위상은 눈에 띄게 약화됐다. 민주시민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그 핵심 기반인 학생 자치는 정책의 전면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 결과, 청소년들 사이에는 사회에 대한 거리감과 정치적 냉소, 단순화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듣기만 하고, 연습해보지 못한 결과다.
학생인권은 선언이 아니라 훈련이어야 한다
한때 학교는 작은 민주주의의 연습장이었다. 학급 회의에서 안건을 직접 올리고, 친구들과 토론하며 서툴지만 스스로 결론을 내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학교 풍경은 다르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지만, 학생들이 실제로 권리를 행사하고 책임을 배우는 장면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권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권리를 사용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학생 자치는 바로 그 훈련의 중심에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경기도교육청 시민감사관으로 4년간 활동하며, 학교 현장의 경험이 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었다.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학생자치회와 학부모회 운영 자료, 회의록을 살펴보며 학교 자치의 실제 모습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학교 현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까이에서 알 수 있었다.
많은 학교에서 학생 자치는 조직만 존재할 뿐, 실제 회의나 토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자치 활동은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로 밀려, 결국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회의록은 남아 있지만, 학생들의 고민과 토론 흔적은 찾기 어렵다. 형식만 남고 내용은 비어 있는, 이른바 '유령 자치'다.
그러나 의지가 있는 학교는 다르게 움직였다. 학교장의 분명한 방향 제시와 담당 교사의 꾸준한 의지가 있는 곳에서는 학생들과 함께 방법을 찾아 실제 회의와 토론을 진행했다. 점심시간을 쪼개 자치 모임을 이어가거나 아침 출석 전 짧은 시간을 활용해 회의를 열기도 했다. 형식보다 내용에 집중하며, 학생들이 실제로 발언하고 결정하는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학교에서는 학생 자치가 행사나 장식이 아니라, 학교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민주시민 교육의 성패, 학생 자치에 달렸다
민주시민 교육은 교과서 속 개념 암기가 아니다. 친구들 앞에서 자기 생각을 말하고, 반대 의견을 듣고, 갈등을 조정하며 공동 결론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다. 이 과정이 반복될 때, 민주주의는 지식이 아니라 태도가 된다.
학생 자치는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중심 무대다. 청소년 인권 역시 이 자치의 장에서 현실로 자리잡는다. 스스로 의제를 정하고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 속에서, 인권은 '보호받는 권리'를 넘어 '함께 책임지는 힘'으로 성장한다.
학생 자치를 되살리기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들이 있다. 첫째, 정기적 활동 보장이다. 월 1회 이상 학생회와 자치회의 시간을 교육과정 속 핵심 수업으로 명확히 확보해야 한다. 자치 활동을 위한 공간과 예산도 상징적 수준이 아닌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
둘째, 자율학교 체제 활용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회의를 이끌고 의제를 설정하며, 그 결과가 학교 운영에 반영되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 인권은 선언이 아닌 현실 권한으로 자리잡는다.
셋째, 교사 지원과 제도적 인정이다. 학생 자치가 특정 교사의 '열정'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인센티브와 업무 인정, 평가 체계를 통해 학생 자치를 학교 핵심 교육 활동으로 확실히 자리잡게 해야 한다.
민주시민 교육과 학생인권이라는 말에 위안을 삼을 때는 지났다. 말은 넘쳐났지만,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한 시간은 줄었다. 학생 자치를 되살리지 않으면 민주시민 교육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토론하고 결정하며 책임지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인권을 삶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학생 자치 부활은 선택이 아니라, 지금 한국 교육이 반드시 되돌아가야 할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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