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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12.06 16:50수정 2025.12.0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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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붉고 노란 단풍이 물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강릉을 떠나 영동·중부·호남고속도로를 잇달아 달려야 하는 340km, 꼬박 4시간의 긴 여정이지만,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이미 길 위를 가볍게 날아간다. 운전대 너머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건, 시골집 마당에서 해마다 한 번 열리는 '즐거운 농사놀이', 바로 김장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오랜 운전 끝에 시골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장작불 연기가 먼저 코끝을 어루만진다. 부엌에서는 푹 삶아지는 젓갈 향이 진하게 퍼지고, 한켠의 소쿠리엔 무와 배추, 당근이 가지런히 놓여 겨울맞이 준비를 마친 듯하다. 부엌 안팎으로는 오가는 웃음과 재잘거림이 가득해, 달려온 시간의 피로가 금세 녹아내린다.

▲ 숨이 적당히 죽은 배추가 소쿠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주변에는 겨울 바람이 스치는 시골집의 정취가 배어 있다. 김장 하루 전날의 조용한 기다림이 풍경 속에 스며든다.
진재중
마당 한쪽에서는 배추를 절이며 소금을 잎사귀 사이사이에 정성스레 문지른다. 잎이 스치는 바삭바삭한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처형은 큰 항아리에 양념을 풀어 고춧가루와 마늘, 젓갈을 한 숟가락씩 더한다. 30여 가지의 각종 재료가 들어간 붉은 양념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며 따뜻한 온기와 매콤한 향이 동시에 코끝을 자극한다.
내일 있을 김장을 앞두고 모두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오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져 온 시골의 겨울맞이 풍경은, 또 한 해의 문을 열기 위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마늘을 다지고 파를 썰며 김장 양념을 준비하는 모습.
진재중

▲ 갓 다져낸 마늘과 잘게 썬 파, 고춧가루가 뒤섞여 김장 특유의 풍미를 만들어낸다. 수십 가지 재료가 모여 생겨난 윤기와 색감이 눈길을 끈다.
진재중
다음 날, 드디어 본격적인 김장 버무리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허리가 아프지 않도록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을 만든다. 대여섯 시간 내내 서서 해야 하는 일이라 준비부터 단단히 해야 한다. 벽돌을 받쳐 높이를 맞추고 나면, 잘 절여진 배추가 테이블 위로 옮겨진다. 노랗게 속잎을 드러내고 고개를 푹 숙인 배추는 보기만 해도 맛이 살아나는 듯 싱그럽다. 어제 달여둔 고춧가루 양념과 젓갈, 파 등 갖가지 재료가 배추와 만나 본격적으로 버무려진다. 가져갈 김장 배추는 각자가 직접 속을 넣어 만든다. 똑같은 배추, 같은 양념이라도 어떤 손에서 버무려지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 이때야말로 '손맛'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배추를 버무리며 웃음꽃을 피운다. 손끝마다 정성이 묻어나는 따뜻한 김장날의 풍경.
진재중
처가의 김치 맛은 어디에서도 쉽게 따라올 수 없다. 그 비결은 다름아닌 황석어 젓갈이다. 이 젓갈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김장의 맛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처형은 김장 한 달 전부터 황석어, 일명 '황세기' 젓갈을 준비한다. 1년 이상 숙성된 최상의 재료를 골라 장작불 위에서 밤새 달인다. 깊은 향이 응축될 때까지 한밤중에도 불길을 살피며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완성된 젓갈은 양념 속으로 스며들어 배추 깊숙이 베어들고, 다른 곳에서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깊고 시원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결국 김장의 성패는 배추나 양념만이 아니라, 젓갈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준비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 집 김장은 '손맛' 이전에, '불맛과 기다림의 맛'이 고스란히 깃든 특별한 겨울 음식이 된다.

▲ 붉은 양념과 배추가 조화롭게 어울리며 먹음직스러운 김치로 완성되어가는 장면. 정성스러운 손길이 깊은 겨울 맛을 만들어낸다.
진재중
손맛의 달인인 처형은 배추와 양념을 앞에 두고 조심스레 손을 놀린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짧지만 단단한 한마디를 건넨다.
"김장은 손에서 나온다. 정성껏 버무려야 해."
그 말에 힘을 얻은 듯, 옆에서 조카도 양념을 배추 속에 조심스레 섞기 시작한다. 버무리던 김치를 한 조각 집어 깨소금을 톡 찍어 맛보더니, 눈을 번쩍 뜨며 단호하게 외친다.
"굿!"
그 순간, 김장터에는 손길과 맛, 그리고 가족의 기운이 한데 어우러진다. 버무려진 김치는 산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허리는 쑤셔오고 얼굴에는 고춧가루가 묻어, 마치 혼자 힘으로 김장을 다 해낸 듯한 너스레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 바로 버무린 김장김치가 선명한 붉은 빛을 자랑한다. 양념이 속속들이 배어, 겨울 내내 식탁을 지켜줄 깊은 맛이 기대되는 모습.
진재중
그런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있다. 바로 수육이다. 김장날이면 늘 자리하는 별미로, 둘째 처제가 정성껏 준비한 것이다. 갓 버무린 김치 위에 따끈한 수육 한 점을 올려 한입 베어무는 순간, 김장날의 진짜 맛이 비로소 완성된다.

▲ 김장하는 날, 이웃이 들러 일손을 보태며 마당이 한층 더 활기를 띤다.
진재중
평소 집안일에는 잘 참여하지 않던 처남도 이날만큼은 바쁘게 움직인다. 장작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삼겹살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갓 버무린 김치와 함께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이날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김장 요리가 완성된다.
이웃집 아주머니도 김장터에 합류한다. 삼삼오오 모여든 이웃들은 손을 거들며 함께 배추를 버무린다.
"요즘은 이런 김장 풍경 보기 힘들잖아요."
아주머니는 연신 부러워하며 말을 잇는다.
"가족들이 모여 김장하는 모습도 점점 마을에서 사라지고 있어요.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인데, 참 아쉽네요."
김장터에는 이웃과 가족이 어우러진 정겨운 손길과, 잊혀가는 전통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흐른다.

▲ 노을빛이 스며든 마당에서 가족들이 웃으며 김장을 마무리한다. 손끝에 묻은 양념만큼 따뜻한 정이 모여, 서로의 손을 맞잡아 완성한 가족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하루.
진재중
어느새 겨울 햇살이 부엌 창을 비추며 은은하게 반짝인다. 한기 속에서도 장작불과 손길의 열기로 부엌과 마당은 따뜻함이 가득하다. 어쩌면 머지않아 사라질지 모를 시골의 풍경. 하지만 이날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 웃고 떠들며, 한 해를 견뎌낸 보람과 정이 넘치는 가장 풍요로운 날이 된다.

▲ 장독대 옆 마당에서 가족들이 김장 준비에 분주하다. 고운 햇살 아래 장독과 김장 도구들이 어우러져 정겨운 시골 풍경을 이룬다.
진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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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맛과 기다림의 맛 잔뜩 배인, 김장 김치 보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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