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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어둠과 함께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간

[시로 읽는 오늘] 이소연 '접시는 둥글고 저녁은 비리고'

등록 2025.12.11 09:01수정 2025.12.1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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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기자말]
접시는 둥글고 저녁은 비리고
- 이소연

저녁 여섯 시 의자의 그림자가 짧아지면 접시의 식사가 시작된다
작은 접시들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접시는 입을 쩌억 벌리기 위해서 존재한다
할머니로부터 엄마로부터 나로부터 접시는 존재한다

식탁 위에는 접시들이 많아 조금은 재미나고
조금은 단순해진다 그러나 접시는 한 가지의 표정을 가진다
깨끗한 접시일수록 입술이 많고
자주 더럽혀진 접시가 가진 거라곤 깨끗한 죽음밖에 없다

빨강 노랑 파프리카 담긴 접시를 접시가 먹는다

명랑하게 텅 비어 있는 접시들이 떠오른다고 생각하면
빨강 노랑 입들이 만드는 주방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토마토스파게티 냄새 위로 치즈가 녹을 때,
그러니까 얇디얇은 접시의 테두리를 감싸쥘 때
나는 떨어지기 직전의 접시를 만난다


접시는 둥글고 저녁은 비리고 그러나 나는 접시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진 접시를 먹는다, 저녁 식탁은 접시를 이해할 수 없고


내겐 다물어지지 않는 입이 필요하다

출처_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 사람, 2020
시인_이소연: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거의 모든 기쁨><콜리플라워>가 있다.

 비워지기 위해 접시가 된 마음
비워지기 위해 접시가 된 마음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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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어두워지는 시간, 나는 저녁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날것의 비릿한 냄새는 늘 생경해서 둥근 접시가 음식을 먹는 풍경이 이상하지 않다. 각자의 욕망이 어둠과 함께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간. 대를 잇는 고달픈 노동도,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 허기도, 접시들이 많아지면 즐겁고 유쾌해진다. 파프리카를 담은 접시를 접시가 먹고, 빈 접시들이 떠오르면, 급기야 나는 접시를 뒤집어쓴다. 둥근 접시는 순환하는 생과 죽음이자, 나를 닮은 얼굴들이고, 기괴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본능의 민낯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불현듯 발견한 낯선 감각이 나에게 묻는다. 당신의 다문 입은 언제 다시 열리는가. (정미주 시인)
#이소연시인 #접시는둥글고저녁은비리고 #나는천천히죽어갈소녀가필요하다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
댓글

(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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