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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대체 어떤 시간을 통과해 온 걸까

[시로 읽는 오늘] 하상만 '텃밭'

등록 2025.12.08 09:03수정 2025.12.0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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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기자말]
텃밭
- 하상만

아버지가 상추를 사랑하시자
나머지는 잡초가 되었다
사랑하는 것을
아버지는 부지런히 사랑하셨다
땅을 고르고
두엄도 주고
두둑에 비닐을 덮어
따뜻하고
바람에 잡초 씨가 날아와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안락한 집을 만드셨다
아버지의 눈빛과 손길 발걸음 소리로
상추는 무럭무럭 자랐다
노란 꽃을 피우는 변두리 잡초가 나는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그것을 걷어내셨다
그건 돌나물꽃이었다
내가 다른 것을 쳐다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상추와 나는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나 같은 것들 속에서 자랐다
다른 것과는 이웃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하려고 허름한 옷을 입었고
타지 않으려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아버지의 땀방울을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나에게 자주 속삭였다


출처_시집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걷는사람, 2022.
시인_하상만: 2005년 <문학사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간장><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등이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자라는 동안, 잡초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아버지의 사랑이 자라는 동안, 잡초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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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버지들은 한때 개발주의 시대의 역군이었다. 그들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가부장, 권위 같은 말도 구태가 되어 간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이 시는 슬프게 다가온다. 과거엔 우리가 '상추'였을지 몰라도, 앞으로의 그들은 우리의 '잡초'가 될지도 모른다. 노쇠하고 볼품없어졌으므로. 그럼에도 그들의 땀방울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친 사랑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사랑은 사랑이다. 부지런한 사랑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전보다 살기 좋은 시대라고 어른들은 말한다. 그러나 텃밭을 가지는 것조차 힘겨운 세상이다. 곧 겨울이다. 그들은 대체 어떤 시간을 통과해 온 걸까. (문경수 시인)
#하상만시인 #텃밭 #추워서너희를불렀다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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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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