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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성(姓)을 갈아치운 사람들, 이유가 납득이 되네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강원도 역사 여행 13] 포용의 천재, 고려 태조 왕건

등록 2025.10.20 13:42수정 2025.10.2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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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틀리면 내가 성(姓)을 간다, 성을 갈아!"

혹시 여러분의 성(姓)은 무사하신지.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확실한지 내세울 때 조상과 가문의 상징인 성을 건다. 나도 어린 시절 걸핏하면 성을 걸었다. 마음껏 우기다 자주 성을 갈았다. 만약 장담한 내용이 틀리면? 온갖 놀림이 이어지며 창피할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성을 간 사람이 수두룩했던 때가 있다. 그때는 성을 가는 것이 치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부와 명예를 보증해주었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이가 고려 태조 왕건이다.

기꺼이 성을 간 사람들은 누굴까? 왕건은 왜 성을 간 이들을 융숭하게 대접했을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다. 임영관, 즉 강릉 대도호부 관아다.

지난 역사 여행에서 신라의 마지막을 다룬 후, 고려 시대 여행을 시작하려던 참에 강릉 국가유산 야행(夜行)이 열렸다. 강릉 야행은 1년에 단 한 번 늦은 밤까지 임영관을 활짝 열고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펼쳐지는 축제다. 어제의 적을 오늘의 아군으로 품으며 후삼국을 통일했던 태조 왕건의 포용력을 닮았다. 왕건과 기꺼이 성을 간 사람들 이야기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임영관 삼문 강릉 국가유산야행 주간에 아이들과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찾았다.
▲임영관 삼문 강릉 국가유산야행 주간에 아이들과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찾았다. 최다혜
강릉대도호부관아 입구 강릉 국가유산야행을 맞이하여,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밤에 개방했다.
▲강릉대도호부관아 입구 강릉 국가유산야행을 맞이하여,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밤에 개방했다. 최다혜

왕건이 아낀 동쪽의 서울, 강릉

아이들과 임영관 삼문 앞에 섰다. 임영관 삼문에는 색이 하나도 칠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을 견딘 사물이 뿜어내는 고귀한 품위 덕분인 걸까.


"이 문은 몇 년 정도 됐을 것 같아?"
"음, 한 100년?"
"거의 1000년이야. 고려의 첫 왕,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세워줬거든. 그 때가 936년이니 1000년 좀 넘었어."
"어떻게 1000년을 버티지?"
"굉장하지. 요즘 콘크리트 아파트도 채 100년을 넘기기 힘든데 말이야."

아쉽게도 임영관 내 1000년을 버틴 건물은 삼문 뿐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내 다른 건물들도 100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약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때 삼문과 칠사당을 제외하고 모두 헐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경찰서를 세웠다. 분한 역사다. 아픔을 딛고 최근 복원을 시작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는 중이다.


임영관 담길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헐렸던 임영관을 복원하며 본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중이다.
▲임영관 담길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헐렸던 임영관을 복원하며 본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중이다. 최다혜

만약 임영관이 건재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아이들과 임영관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면 한 시간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영관은 그 규모가 83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83칸의 규모란 어느 정도일까? 조선 시대 때, 오직 왕실의 궁궐만이 100칸 이상의 건물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임영관은 지방으로 출장 나온 중앙 관리들을 위한 숙소, 즉 객사(客舍)였다. 객사였음을 감안하면 굉장히 크고 으리으리하게 지은 것이다. 이는 왕건이 강릉을 많이 아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강릉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은 인구 약 20만 명의 바닷가 옆 작고 귀여운 도시지만, 왕건은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으로 불렀다. 동쪽의 서울. 수도에 준하는 지명이었다. 또한 왕건은 강릉 호족의 딸들(그렇다. 한 명이 아니었다. 둘이었다.)과 결혼까지 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임영관과 수도에 준하는 지명, 여기에 두 명의 강릉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까지. 도대체 강릉의 무엇이 고려 태조의 환심을 산 것일까?

실은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 다르게 물어야 한다. 강릉이 왕건의 마음을 훔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건이 강릉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왕건은 왜 강릉과 잘 지내보려 한 것일까?

강릉 대도호부 관아의 칠사당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서 관리들이 일곱가지 일을 하던 건물이었다. 조선 고종 임금 때 화재로 소실됐다가 다시 복원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임영관 삼문과 함께 헐리지 않고 버텼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의 칠사당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서 관리들이 일곱가지 일을 하던 건물이었다. 조선 고종 임금 때 화재로 소실됐다가 다시 복원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임영관 삼문과 함께 헐리지 않고 버텼다. 최다혜

강릉 임영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했던 해(936년)에 강릉에 임영관을 세웠다. 임영관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강릉 임영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했던 해(936년)에 강릉에 임영관을 세웠다. 임영관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최다혜

비주류 지방 출신 호족, 왕건의 삼국 통일 전략

그는 강릉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 호족들과 잘 지내보려 애썼다. 결혼을 29번이나 할 정도였다. 강릉 출신 후비(后妃) 두 명 말고도, 전국 곳곳의 여인 27명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두게 된 것일까. 그게 전국 곳곳 호족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고려의 태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왕건은 신라 시대 개성 호족 출신이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방의 호족을 왕으로 섬기라니. '너만 호족이냐? 나도 호족이다!' 같은 심산이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견훤의 후백제와 기존 왕조였던 통일신라 틈을 비집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대 속에서 왕건이 선택한 전략은 유래 없이 압도적인 포용이다. 똑같은 비주류 지방 출신 호족이었지만 힘과 권력으로 기세를 눌러버리려던 견훤과는 정반대 전략이었다. 그 전략 중 하나로서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 가족이 되기로 했다.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의 29명 딸들과 결혼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전국 곳곳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두게 된다.

왕건은 해냈다. 강릉을 비롯한 전국 곳곳 지방 호족들은 물론이고, 발해의 유민, 후백제의 견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도 왕건과 한 팀이 됐다.

강릉 임영관 삼문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936년), 강릉에 임영관을 세우고 수도에 준하는 동원경(東原京)으로 불렀다.
▲강릉 임영관 삼문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936년), 강릉에 임영관을 세우고 수도에 준하는 동원경(東原京)으로 불렀다. 최다혜

기꺼이 성을 간 사람들

왕건의 창의력은 결혼정책에서 끝이 아니다. 그는 지방 유력 호족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줬다. 이 선물을 받으면 부와 명예, 그리고 관직까지 뒤따랐다. 그게 바로 '성(姓)'이다. 왕과 같은 왕(王)씨 성을 선물 받은 가문도 있고, 다른 성을 하사 받기도 했다. 우리 나라 성의 대부분은 고려시대 왕건이 하사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고려 시대 때 '성을 간' 사람은 태조의 압도적인 신임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강릉에도 왕씨 성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순식(金順式)과 김예(金乂)다. 강릉 유력 호족이었던 김순식은 왕순식(王順式)이 됐고, 신라 왕실의 후예였던 김예는 왕예(王乂)가 됐다. 그들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마지막 결전이었던 일리천 전투의 최전선에 섰다. 이 전투는 아버지인 견훤을 가두고 후백제의 왕이 되고자 했던 견훤의 아들, 신검과의 전투였다. 이 때 4만 명의 마군(馬軍) 중 절반인 2만을 김순식 부대가 지휘를 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여기서 퀴즈. 왕건의 성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왕씨지."
"땡. 정답은 '없다'! 신라 시대 때, 지방 호족들에게는 성이 없었대."

왕건의 아버지는 용건, 할아버지는 작제건이다. 그러면 설마 건(建)이 성일까? 그것도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3대(代)가 나란히 이름 끝에 건을 쓴 이유를 설명해주는 설화가 있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장인어른은 서해 용왕이었다고 한다. 서해 용왕은 작제건에게 귀띔 하나를 해줬다.

"동방의 임금이 되려면 '건(建)'자 붙은 이름으로 자손까지 3대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작제건의 아들은 용건, 그리고 손주는 왕건으로 이어진다. 신라 시대 지방 호족이라 성 없이 이름 뿐이었던 왕건은 '왕'을 자신의 성으로, '건'은 자신의 이름으로 쪼갠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자신의 성을 지방 호족들에게 하사한 것이다. 왕과 같은 성을 쓰게 되었는데 없던 충심도 끓어오르지 않겠는가.

서해 용왕의 예언처럼 왕건은 고려의 임금이 된다. 일본은 임영관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경찰서를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른 나라를 억압했던 일본은 결국 패망하고 역사의 죄인이 됐다. 하지만 왕건은 달랐다. 망한 나라의 사람들에게조차 넉넉히 대접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포용의 천재였다. 세계를 포용하는 K(고려, Korea)의 시작은 이토록 너그럽다.
#초등학생도이해하는강원도역사여행 #강릉대도호부관아 #강릉고려역사유적 #임영관 #임영관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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