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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관이 숨어 있다니! 기를 쓰고 찾아갈 만합니다

미국 몬태나주 글레이셔 국립공원 여행기(1)

등록 2025.10.11 18:16수정 2025.10.1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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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인 트레일에서 올라가 바라본 그린넬 호수 멀리 그린넬 빙하가 보이고 빙하에서 흘러 내려온 물로 채워진 옥빛 호수를 웅장한 산맥이 에워싸고 있다.
▲하이라인 트레일에서 올라가 바라본 그린넬 호수 멀리 그린넬 빙하가 보이고 빙하에서 흘러 내려온 물로 채워진 옥빛 호수를 웅장한 산맥이 에워싸고 있다. 백종인

시작은 순조로웠다. 아침 7시 30분 숙소를 출발하여 글레이셔 국립공원(Glacier National Park)으로 들어서니 아침 이슬로 말끔히 씻긴 시더우드(cedar wood) 숲길이 고잉-투-더-선로드(Going-to-the-Sun Road)로 우리를 이끌었다.

80km에 달하는 고잉-투-더-선로드는 글레이셔 공원을 동서로 연결하는 척추 같은 도로로 우리의 목적지는 도로의 가장 높은 지점인 해발 2025m에 자리 잡은 로건패스(Logan Pass)였다. 로건패스가 있는 곳은 물의 흐름이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뉘는, 즉 대륙을 동서로 분할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하이라인(Highline) 트레일은 대륙 분할의 서쪽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향하는 코스다.


숲길 사이로 살짝 보이는 거대한 맥도널드 호수(Lake McDonald)를 일단 무시하고 전진하니 구불구불했던 숲길이 절벽 길로 변하면서 더 꼬부라졌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답게 도로의 왼쪽은 하늘을 향해 절벽이 뻗어있고, 오른쪽은 절벽 아래와 위로 시야가 트이면서 녹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들판, 멀리 보이는 계곡의 글레이셔, 그리고 높은 산봉우리 절벽 사이로 글레이셔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구름이 아침의 황홀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완전히 한 바퀴를 도는 듯한 루프(Loop)를 통과하며 10km 정도를 더 올라 우리의 목적지인 로건패스에 도착했다.

하이라인 트레일

하이라인 트레일 초입에서 바라본 아침나절 공원의 모습 하이라인 트레일 초입에서 바라본 아침나절 글레이셔 공원의 모습 하이라인 트레일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고잉-투-더-선로드를 올라오면서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이라인 트레일 초입에서 바라본 아침나절 공원의 모습 하이라인 트레일 초입에서 바라본 아침나절 글레이셔 공원의 모습 하이라인 트레일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고잉-투-더-선로드를 올라오면서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종인

하이라인 트레일은 25km라는 긴 거리를 걸을 수 있는 다리 힘만 있다면 오르내림이 별로 없어 아주 어려운 코스는 아니다. 특히 원점 회귀를 해야 하므로 힘에 부치면 어디서든 되돌아올 수 있다. 한편, 여름 성수기에는 트레일의 도착지인 그래닛 파크 샬레(Granite Park Chalet)를 거쳐 루프로 내려가 공원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로건패스까지 돌아갈 수 있어 거리는 20km로 줄어든다.

9월 말에 접어든 시점이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5km를 걷기로 하고, 목적지를 그래닛 파크 샬레가 아닌 11km 지점에서 높이 300m를 올라야 하는 그린넬 호수 전망대(Grinnell Glacier Overlook )로 정했다. 도착 지점이 역사적인 건물보다는 산꼭대기여야 할 것 같았고, 그곳 전망대가 힘든 만큼 충분한 가치를 제공한다는 글을 여기저기서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이라인 트레일을 걷다 뒤돌아 본 전경 차가운 구름이 걷히며 햇볕이 강해지고 있다.
▲하이라인 트레일을 걷다 뒤돌아 본 전경 차가운 구름이 걷히며 햇볕이 강해지고 있다. 백종인

9월이 끝나가는 아침 9시, 산 위로 피어오르는 차가운 구름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패딩 조끼까지 껴입고 하이라인 트레일 입구로 향했으나, 강해지는 햇볕과 몸속의 열기로 하나씩 옷을 벗으며 우리는 곧 반팔 차림이 되어 걷고 있었다. 곰을 만날 수 있다는 경고에 베어 스프레이를 허리춤에 차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장하기 위해 팟캐스트를 들으며 해발 2000m의 거대한 산등성이를 걸어 나갔다.


하이라인 트레일의 절벽 구간 절벽 길은 폭이 1m가 넘어 오른쪽 암벽에 연결된 케이블이 과해 보일 정도였으나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잘못되어 넘어진다면 무척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하이라인 트레일의 절벽 구간 절벽 길은 폭이 1m가 넘어 오른쪽 암벽에 연결된 케이블이 과해 보일 정도였으나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잘못되어 넘어진다면 무척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백종인

처음 2km 정도는 오른쪽은 우뚝 솟은 바위산을 끼고 왼쪽은 산 아래 방금 지나온 고잉-투-더-선로드가 보이는 절벽 길로 약간의 내리막이었지만 대체로 평탄하였다. 절벽 길은 폭이 1m가 넘어 오른쪽 암벽에 연결된 케이블이 과해 보일 정도였으나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잘못되어 넘어진다면 무척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실제로 올 8월 말 70대 여자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절벽 길은 이후에도 잠깐씩 나타났으나, 다음 몇 km 구간에서는 작은 숲을 드나드는 오솔길이 나왔고 비탈진 야생화밭을 가로지르며 작은 폭포도 만났다.


경치는 장관임에도 혹시나 곰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계속 주위를 살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혹시 곰을 봤느냐, 야생 동물을 봤느냐 하고 물으며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고 즐거움을 나눴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친 것은 손가락 크기의 다람쥐와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정도였다.

비탈진 야생화밭 가을이라 야생화는 지고 없었으나 높은 산의 초원이 아름다웠다.
▲비탈진 야생화밭 가을이라 야생화는 지고 없었으나 높은 산의 초원이 아름다웠다. 백종인
유일하게 만난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실제로 마주친 야생 동물은 손가락 크기의 다람쥐와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정도였다.
▲유일하게 만난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실제로 마주친 야생 동물은 손가락 크기의 다람쥐와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정도였다. 백종인

'이런 경관이 숨어 있다니!'

4시간이 지나며 다리가 무거워질 무렵 드디어 그린넬 호수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났다. 위를 바라보니 갈 길이 한심해 보였다. 직각 삼각형의 경사면으로 보이는, 1km를 걸으면서 300m를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자갈길이었다.

한 임산부가 가볍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가다듬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얼마 가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이 정도는 아닌데' 의아해하며 가다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당까지 보충하며 정말 죽을힘을 다해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 지대였던 것이다. 다행히 길은 처음 경사에 비해 다소 완만해지며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대륙 분할의 꼭짓점이었다.

그린넬 호수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올라가다 찍은 사진으로 1km를 걸으면서 300m를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자갈길이다.
▲그린넬 호수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올라가다 찍은 사진으로 1km를 걸으면서 300m를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자갈길이다. 백종인

그리고, 산 아래 전망을 보는 순간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런 경관이 숨어 있다니!' 멀리 그린넬 빙하가 보이고 빙하에서 흘러 내려온 물로 채워진 옥빛 호수를 웅장한 산맥이 에워싸고 있었다. 고도에 적응되면서 이제까지의 고단함은 말끔히 사라졌다.

하이킹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이제 긴 거리를 걸어 돌아갈 일만이 남은 셈이었다. 경사가 심한 하산 길 역시 만만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오르는 것에 비할 것인가? 생각보다 길고 오래 걸리겠다는 판단으로 어둡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 아마도 5km 이상을 걸었던 거 같다. 잠깐 주저앉아 다리 쉼을 하고 있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되돌아가는 길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아무도 만나지 않은 차에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돌아가는 트레일이 폐쇄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심하게 부상을 당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길을 막았다는 소식이었다. 절벽 길을 막으면 로건패스까지 어떻게 가란 말인가? 이곳에서 로건패스까지 돌아갈 방법은 뒤돌아서 전망대로 올라가는 지점까지 5km를 다시 가고 거기에 8km를 더 걸어 루프까지 간 이후,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우리 차가 주차된 곳까지 가는 것이 유일하였다. 우리에게 정보를 전해준 부부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목표도 해가 지기 전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 되었다.

저무는 햇살이 비추는 루프까지 가는 길, 오후 6시 지루한 숲속 길이 끝나고 시야가 확 트인 산등성이 길에서 바라본 전경
▲저무는 햇살이 비추는 루프까지 가는 길, 오후 6시 지루한 숲속 길이 끝나고 시야가 확 트인 산등성이 길에서 바라본 전경 백종인
노랗게 물들어 가는 산야 지치고 초조한 가운데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모습
▲노랗게 물들어 가는 산야 지치고 초조한 가운데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모습 백종인

변수, 그리고 뜻밖의 행운

걸어야 할 길은 너무 길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망대로 올라갔던 지점을 지나고 그래닛 파크 샬레를 그대로 지나쳤다. 길은 계속 내리막길이었고 초조한 가운데 다리는 지쳐갔다. 지루한 숲속 길이 끝나고 시야가 확 트인 산등성이 길이 나왔다. 어느덧 저무는 햇살이 비추는 가운데 노랗게 물들어 가는 산야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숲길도 드디어 끝이 났다. 숲을 빠져나와 루프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차가 주차된 로건패스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차량을 물색해야 할 차례였다. 7시가 넘은 시간에 도로의 위쪽으로 가는 차는 드물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몇 대 안 되는 주차된 차의 주인들에게 우리 사정을 말하고 있을 때, 어느 한 젊은 여성이 선뜻 나서 주었다.

루프 주차장으로 나오는 숲길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숲길이 끝나면 루프 주차장이다. 이 사진은 다음날 오후 5시 경 루프 트레일 입구를 찾아 찍은 사진이다.
▲루프 주차장으로 나오는 숲길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숲길이 끝나면 루프 주차장이다. 이 사진은 다음날 오후 5시 경 루프 트레일 입구를 찾아 찍은 사진이다. 백종인

또 다른 뜻밖의 행운도 찾아왔다. 차가 로건패스를 향해 구부러진 도로를 올라가는데, 작은 블랙베어 새끼 한 마리가 도로 난간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가 하면 덩치가 큰 놈이 도로 한가운데를 오가기도 하였다. 가장 안전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곰을 목격한 것이다.

12시간 만에 우리의 차로 돌아갔다. 30km를 훌쩍 넘는 산길을 10시간 넘게 걸었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피멍이 들었다. 그러나 하늘과 맞닿은 절벽 길, 얼굴이 노랗게 질리며 올라갔던 가파른 길, 대륙을 분할하는 꼭대기 전망대에서 느낀 성취감, 아름다운 빙하 호수, 지는 해에 눈이 부시던 노랗게 물든 들판, 우리를 살려준 고마운 여인, 그리고 넉넉한 품새로 도로 한복판을 어슬렁거렸던 블랙베어 등 지금 생각하면 마치 꿈을 꾼 것 같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글레시어 국립공원은 7월과 8월이 성수기로 9월 이후는 많은 서비스가 중단됩니다. 그럼에도 Going-to-the-Sun Road는 서쪽에서 진입할 때 9월까지 예약을 해야 합니다. 여행 계획을 세우기 전 https://www.nps.gov/glac/index.htm을 반드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레시어국립공원 #하이라인트레일 #로건패스 #루프 #그린넬호수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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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반 동안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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