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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세 할아버지 두 분과 함께 한 여행, 이래서 좋았다

피곤한 기색 없이 일정 소화... '여행길 동반자' 두 분의 건강을 빌다

등록 2025.10.02 14:40수정 2025.10.0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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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마셔봐~. 맛있어."
"아이고 좋~다. 두 놈 짭짭, 한 놈 다이, 한 놈 몰라."

지난 9월 16일 인천국제공항 14번 게이트. 내 앞에 앉으신 할아버지 두 분이 서로 다정하게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한 어르신께서 오렌지 주스 두 개를 사와 맛있다며 친구에게 권했다. 맛을 본 한 어르신께서 "둘이 같이 마시다가 한 명이 죽어도 나는 모르겠다"라는 식의 농담을 던지신 것. 어르신의 유머 감각에 앞에 나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웃는 나를 보고 "중학 동창이여유~"하신다. 조심스럽게 연세를 물으니 87세라고 한다. 여행사 이름을 대며 같이 가는 일행이 맞냐고 물으신다. '예'라고 대답하였지만 그때부터 걱정이 앞섰다. "괜찮을까"하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패키지 상품 특성 상 계약 후 파기하기 힘들어 눈을 찔끔 감고 가는 중이었다.

미국 여행에서 만난 할아버지들

미국 뉴욕 자유의 여인상 우리는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명칭은 '자유의 여인상'이란다. 일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미국 뉴욕 자유의 여인상 우리는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명칭은 '자유의 여인상'이란다. 일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이호영

나의 걱정을 눈치 채신 듯 북유럽, 서유럽, 동유럽, 미국 서부 등등 세계 곳곳을 다 가보았다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을 많이 하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투의 암시를 보내신다. 친구와 함께 자주 여행을 동행했다며 끈끈한 우정도 자랑하셨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우려와 달리 어르신들은 13시간 뉴욕행 비행을 거뜬히 이겨내고 공항 도착 미팅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참여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 동부 여행은 9박 12일 동안 진행됐다. 첫날은 뉴욕 한 바퀴를 도는 일정이고 둘째 날 워싱턴DC, 나이아가라 폭포, 캐나다 몬트리올, 퀘벡을 돌아 보스턴 하버드 대학교,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버스 탑승 시간만 55시간에다 거리는 4000km란다. 우리나라를 삼천 리 금수 강산이라 하는데 3천 리는 약 1200km다. 그럼 우리나라 남북을 왕복하고 북쪽으로 다시 올라간 후 400km, 천 리 가까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할 정도로 먼 거리다.

나는 컨디션이 좋지 못한 상태로 미국 여행길에 오른 탓에 여행 코스 내내 50명의 다른 일행보다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 관절이 좋지 못해 절룩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87세 할아버지들은 항상 가이드 옆에서 앞장서서 걸었고, 관광지를 돌아보고 다시 모이는 곳에 시간 늦게 도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에 나선 동행자들은 뉴욕 맨해튼, 자유의 여인상, 타임스퀘어 등을 돌며 자유분방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미국 시민의 모습과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 규모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87세 할아버지들의 여행 모습에 더 놀랐다.


낯선 사람들과 나선 패키지 여행이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식사 때 서로를 탐색하기도 한다. 탐색전 상당수가 87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저 분들의 건강과 모습, 언행 등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 일쑤였다. 모두들 "내가 저 나이 때 과연 저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저 분들만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등 어르신들의 건강한 모습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할아버지께서 아침을 드시면서 콜록 기침을 하셨다. 간밤에 좀 춥게 잤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별일 아니라는 듯 미국식 아침인 빵과 소시지, 베이컨 등을 드셨다. 그러자 일행 가운데 한 할머니께서 "약 드셨나? 몸은 어떠하냐?" 등을 물으며 할아버지의 건강을 챙겼다. 많은 분이 아침마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묻거나 준비한 비상약을 건네고 따뜻한 물을 드리며 여행길을 도왔다.

나이아가라 폭포, 캐나다쪽 폭포이다. 오대호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거대한 폭포를 이뤘다. 할아버지들은 폭포 상단 관람과 폭포 속 동굴 관람 등 모든 일정을 함께 하셨다.
▲나이아가라 폭포, 캐나다쪽 폭포이다. 오대호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거대한 폭포를 이뤘다. 할아버지들은 폭포 상단 관람과 폭포 속 동굴 관람 등 모든 일정을 함께 하셨다. 이호영

여행자끼리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하게 되면서 할아버지들도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면서 한 동행자가 할머니와 함께 오시지 왜 혼자 여행길에 나섰냐고 물었다. 한 할아버지의 말씀이 "난 혼자가 되었고, 저 친구는 평생 둘이 되어 본 적이 없어요" 하셨다. 한 마을 출신의 중학교 동창인데 서로 혼자여서 이젠 여행길 동반자가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9박 12일 여행을 마치고 뉴욕 공항을 떠나 15시간 20분의 비행을 끝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은 뒤 나는 할아버지들께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두 분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더 좋은 여행을 하시기 바랍니다."하며 인사를 건넸다. 여행길 내내 나만 보면 '인천 공항 출발 동무'라고 웃어주시던 두 분의 밝은 모습이 아직도 머리에 선하다.

나도 저 분들 나이 때 건강하게 국내외 여행길을 망설임 없이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부디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미동부 #뉴욕 #캐나다 #나이아가라 #퀘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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