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컷
넷플릭스
광주에서의 살육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이 폭력과 협박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1982년이었다. 이 권력과 폭력은 체계적인 위계를 따라 차곡차곡 흘러내렸다. 누군가에게 착취당한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누군가를 착취해야 했다. 그것이 당시의 시스템을 지탱하는 원리였고,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극 중 악역으로 묘사된 제작자 구중호조차, 이런 시스템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충실한 이행자가 되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이런 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구로공단에서 일하다 친구 주애로 인해 월급도 없는 영화사 제작부장의 조수로 일하게 된 이근하(이주영)다. 근하는 주애의 접대 사건 이후 주연 배우의 옷을 대는 의상점을 협박해 촌지를 두 배로 올려 받으면서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당시의 시스템은 그랬고, 애초부터 월급이 없는 제작부장 조수는 그렇게 해서야 먹고 사는 일이었다. 제작부장은 근하의 행동이 이 바닥의 선을 넘은 것이라고 나무라지만, 근하의 대답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애당초 지킬 선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위, 아래 할 것 없이 온 세상이 엿같은데."(근하)
결국 근하는 영화판을 떠나지만, 그것은 그 세계의 시스템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계속 남았다면 다른 모두가 그렇듯, 폭력과 협박, 갈취의 순환을 따라야 한다. 지켜야 할 선 따위는 없다. 애초에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권력이 흘러내리다 고여 있는 곳
저항과 반발의 대가는 살벌하고 공포스럽지만, 순종의 대가는 달콤했다. 제작자 구중호가 감독의 의도 따위는 철저히 무시하고 마음대로 편집, 더빙한 애마부인은 최초의 심야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은 채 엄청난 흥행을 이루고, 신인배우 주애는 희란의 자리를 위협하는 톱배우로 우뚝 선다. 자기 작품을 멋대로 난도질당한 감독 인우에게 '흥행 감독'이라는 보상은 이 치욕을 견딜 만하게 만든다.
그러나 항상 낮은 데로 흐르는 권력과 폭력에도 고이는 곳이 생기고, 인내심에도 임계점이 있다. 보통 그런 곳에서는 저항, 하다못해 꿈틀거리는 움직임이라도 생긴다. 여배우의 접대가 구중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희란은, 접대에 나갔다 살해당했으나 자살로 처리된 미나(이소이)의 죽음을 계기로 모종의 반란을 꿈꾼다. 그녀는 영화 시상식 자리를 활용해 구중호의 악행을 폭로하고, 정보기관은 폭로를 막으려고 하지만, 함께 '꿈틀거린' 사람들의 도움으로 통쾌한 한 방을 날린다.
주애가 정보기관 요원들에게 붙잡힌 희란을 구해 함께 말을 타고 도망치며 손가락 욕을 하는 장면은 '애마'가 세상과 시스템을 향해 날리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비극적 결말을 맞았겠지만, <애마>는 해피엔딩을 택한다. 이 작은 반란에 가담한 이들은 권력의 진실을 적당히 덮어주는 대가로 다시는 여배우를 접대에 동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희란 덕분에 모두 남산에서 풀려나고, 구중호와 권력의 채홍사 역할을 한 최실장(이성욱)이 희생양으로 선택된다.
사건이 정리된 이후 주애는 여배우로 승승장구하고 희란은 그토록 열망하던 명감독 권도일(김종수)의 작품에 출연한다. 그리고 감독 인우는 구중호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걸작 애마부인을 되살려, '오리지날레'라는 부제를 달아 다시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마친다.
세상을 향한 빅엿! 그러나

▲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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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는 폭력과 억압이 일상이었던 시기, 두 여배우의 작은 저항을 다룬 이야기다.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영화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 스스로 '쌍X'이 되겠다고 결심한 신인 배우와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여배우'들'의 미래를 위해 위험한 반란을 감행한 톱스타는 모든 억눌린 것들의 저항, 최소한 '꿈틀거림'을 상징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희란과 주애는 세상을 향해 빅엿을 날리고 성상납으로부터 여배우를 지켰으며 이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작자와 정보기관 담당자를 처벌했지만, 권력의 핵심은 건들지도 못했다. 우리가 80년대의 역사를 잘 알고 있듯, 책임 있는 권력자들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승승장구했다.
여배우들이 더는 성 상납을 안 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채웠을 것이고, 정보기관의 채홍사 역할도 누군가는 이어받았을 것이다. 결국 '애마'는 세상을 조롱하는 통쾌한 한 방을 날렸지만, 시스템을 바꾸거나, 최소한 개선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1982년의 시절에, 이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애마>는 권력과의 적절한 타협으로 생존을 선택했지만, 그 작은 꿈틀거림이 쌓이고 쌓여 1987년의 거대한 저항을 만든 밑거름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드라마에 잠깐 나온 구로공단 여공들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꿈틀거림을, 소소한 저항을, 세상을 향한 욕설과 빅엿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애마>의 시절과 지금은 또 얼마나 다를까? 권력의 핵심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야 마땅한 사람들이 권력의 핵심을 부여잡고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들의 핵심 중 일부는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안주했던 시스템은 여전히 견고하다. <애마>의 빅엿, 그리고 작은 꿈틀거림,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필요한 시절이다.
긴 연휴, <애마>를 통해 견고하게 남아 있는 이 시스템에 빅엿을 날릴 방법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그러나 주의하라. 추석에 온 가족이 함께 볼만한 드라마는 아니다. 이래 봬도 19금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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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기려고만 하는 시대"... 탑 여배우들의 세상을 향한 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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