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등록 2025.10.04 11:22수정 2025.10.04 11:2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스물둘에 팔 남매집 막내아들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삼십 년 넘게 시집살이를 하셨다. 우리 집에는 때마다 손님이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을 자체가 집성촌이었기에 온 동네가 친지일가였다. 명절은 명절대로, 온갖 관혼상제는 관혼상제대로 손님맞이를 했다.
할머니께서 아흔일곱의 연세로 천수를 누리신 끝에 돌아가신 뒤, 우리 가족의 명절이 바뀌었다. 두 어른께서 계시지 않으니 더 이상 예전처럼 우리 집에 모여 명절을 치르지 않게 된 것이다. 각 가정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별도의 가정을 꾸린 영향도 컸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명절을 보내다 갑작스레 찾아온 공백. 차마 자유라고 표현하지 못 한 건 어색함 때문이었다. 더 이상 전을 부치지 않고, 튀김 기름을 끓이지 않아도 되는데 온전히 그 시간을 누리지 못했다. 영화관에 가고, 가까운 식당에서 외식도 했지만 거주지역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문득 어머니가 한 말씀.
"명절에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겠어."
가족 여행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이 모이면 어떻게든 나가게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회비는 한 달에 십만 원. 부모님, 나와 아내, 동생네 부부가 돈을 모으니 매달 삼십만 원이 쌓였다. 이 돈은 당연히 세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명절을 고려해서 만든 가족여행계는 여름휴가나, 황금연휴에도 작동했다. 여행계의 존재만으로 우리 가족은 큰 부담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가족여행은 그 어떤 경험보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준수
이번 추석, 서울에서 만날 가족
여행계가 있다고 해서 명절에 항상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다. 여행이 없는 명절은 보통 울산에 있는 부모님 댁에 모여 보낸다.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가기도 하고 이모네와 밥을 먹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동생네 가족이 사는 서울에서 모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기간은 추석 당일을 시작으로 2박 3일.
이유가 있다. 임신 중인 동생의 출산이 12월 하순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생은 제법 배가 불러오고 움직임이 제한된다. 서울에서 울산을 왕복하는 명절 이동은 몸에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긴 명절 연휴에 만나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결국 동생네 집에서 2박 3일 간 머물며 서울 여행을 하기로 했다. 첫째 날에는 야간 개장을 하는 창경궁으로, 둘째 날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광화문 일대를 보기로 일정을 짰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한 역귀성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 서울 여행에서는 일절 명절 음식을 장만하지 않는다. 제주에 가면 제주의 음식을 사 먹듯 이번에도 외식이 주다. 집에서 먹는 식사는 간단한 조식 정도다. 요거트와 과일, 견과류 정도로 해결할 것이다. 집을 제공한 사람에게 식사가 과제처럼 여겨져서는 곤란하다. 간단한 식사라 해도 모든 구성원이 함께 도우며 몸을 움직이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서 모두 모이는 것 삼 년 만이다. 서울에 사는 동생을 제외하고 강릉과 울산에 사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서울은 낯설고 재밌는 곳이다. 충분히 흥미로운 여행지가 될 수 있다. 대만 타이베이에서의 일정을 짜듯 2박 3일 서울 일정을 짰다. 동생은 가족의 동선과 세부 활동까지 꽤 신경을 썼다.

▲ 추석 여행 일정과 행복한 여행을 위한 약속
이준수
명절을 편안하게 만드는 몇 가지 요령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동생네 집에서 잠을 자긴 하지만 여행계에서 여행비를 지급한다는 원칙은 동일하다. 이번 여행의 호스트인 동생네는 침구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장보기와 소품 구입을 하니 이십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자동차를 몰고 올라오는 다른 가족에게도 교통비 명목으로 이십만 원을 똑같이 주었다. 그럼으로써 동생네는 초대의 부담을 덜고, 나머지 가족들도 간단한 방문 선물을 준비할 여유가 생겼다.
명절에 가족끼리 모이는 건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여행계를 다년간 경험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가족끼리 만날 때는 기분이 좋아야 다음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난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다. 누군가가 희생하듯 감정적 고통을 심하게 겪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일반적인 선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족 모임에는 며느리(나의 아내)나 사위(동생의 남편)도 있다. 새롭게 식구가 된 멤버들이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행이란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여행이 끝나고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 대가족 여행의 유일한 목표다.

▲ 가족여행의 결과물을 앨범으로 정리하는 것도 의미 깊은 활동이 된다.
이준수
지속가능한 가족 명절 여행을 위한 작은 마음
우스갯소리지만, 대가족 여행을 가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부터 손녀까지 세 식구가 함께하다 보면 서로 양보해야 할 부분이 많다. 가끔 가족여행계로 대가족 여행을 간다는 말을 하면 손사래 치는 사람을 만난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진짜 힘들어서 매일 울었다는 것이다. 효도와 우애는 둘째치고 가족 간 의가 상할 듯해서 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는 하소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웃으면서 여행할 수 있다니 복 받으신 거예요. 부모님 해외여행 금지어 십계명 모르시죠?"
그가 보내준 '가족여행 금지어 십계명' 사진을 보고서 깔깔 웃었다. 열 가지를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불평, 불만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했다.
"겨우 이거 보러 왔냐 금지!"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겠다 금지!"
"아직 멀었냐 금지!"
십계명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했더니 상당히 공감한다는 반응이었다. 단순한 농담이나 호들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나이가 드셔서 그럴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팔팔하던 젊은 날과 달리 노인이 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력이 달린다. 건강한 사람도 아프면 짜증이 늘어나지 않는가.
나도 언젠가는 더 늙은 부모님의 짜증을 받아주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지금보다 더 좋은 숙소를 예약하고, 체험 프로그램의 등급을 높이게 되지 않을까. 구성원이 변하면 여행도 변해야 오래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테니.
이번 추석 서울 여행의 배려 대상 1호는 출산을 앞둔 동생이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활동의 수를 줄이고, 식사도 건강식으로 먹을 것이다. 명절 대가족 여행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맛있는 요리에도 레시피가 있듯, 또 가고 싶은 가족여행에도 지혜와 따뜻한 마음씨가 필요하다.
명절은 가족이 모이는 시간. 가까운 곳이라도 좋으니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진실된 심정으로 나가보는 건 어떨까.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참 좋았다는 느낌이 통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명절여행이 행복하시길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공유하기
명절 대가족여행, '금지어 십계명'은 이제 잊으세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