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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차례 없앴더니 밥상이 이렇게 달라지네요

17년간 전 뒤집고 탕국 끓였는데... 평등한 명절 되니 남편과 싸우지도 않아

등록 2025.10.04 19:15수정 2025.10.0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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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선물 마트에 이미 명절 선물들이 진열 되기 시작했다.
▲명절 선물 마트에 이미 명절 선물들이 진열 되기 시작했다. 한선아

나는 얼마 전까지 명절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던 며느리였다. 어릴 적에 맞던 명절은 마냥 즐거운 휴일이었다. 끝도 없이 차려지던 다채로운 명절 음식들에 행복하기만 했다. 그 음식을 차려내는 누군가의 노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집안 어른이었던 할아버지께 인사를 올리러 오던 친적들까지 대접해야 했던 그 시절, 친정 엄마를 포함한 며느리들은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음식을 내놓고 치우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며느리의 고생을 당연시 여기며 누구 하나 그 공을 치하한 사람이 없었다.


며느리가 느끼는 제사의 무게

결혼 후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 신혼여행 다녀온 후 인사를 드리러 시댁에 갔다. 아버님은 내게 손수 쓴 종이 한 장을 건네셨다. 종이에는 제사 날짜와 제사의 주인공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시댁 조상님들의 기일이 적혀 있는 종이를 받고 나니 내가 말로만 듣던 K 며느리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남편은 제사 날짜도 누구의 제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대한민국 많은 며느리들이 하듯 제사를 준비했고 명절 상을 차려 냈다. 제사든 차례든 상을 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장을 보는 것부터 일이었다. 봉지 봉지 많은 음식 재료들을 장 봐 끙끙 집까지 나르는 것부터 노동의 시작이었다.

자반 조기 나는 명절 일주일 전에 생선을 미리 사 놓고 다듬곤 했었다.제사 장에 생선 까지 살려면 하루 만에 되지 않았기에 틈틈히 장을 봐 둔 것이었다. 생선은 잘 다듬어 냉동실에 둔 후 해동 해 굽곤 했다. 지난 일이지만 그땐 일하면서 어떻게 장을 봤는지 모르겠다.
▲자반 조기 나는 명절 일주일 전에 생선을 미리 사 놓고 다듬곤 했었다.제사 장에 생선 까지 살려면 하루 만에 되지 않았기에 틈틈히 장을 봐 둔 것이었다. 생선은 잘 다듬어 냉동실에 둔 후 해동 해 굽곤 했다. 지난 일이지만 그땐 일하면서 어떻게 장을 봤는지 모르겠다. 한선아

재료들을 다듬는 것 역시 상당히 손이 많이 갔다. 음식을 만들고, 굽고, 튀기고, 치우면 준비가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제사의 진정한 시작은 차려진 음식을 제기에 정갈하게 담아내는 것부터였다. 조상님들 수만큼 밥을 푸고 탕국을 담아내는 과정도 순서가 있었다.

밥은 고봉밥으로 채우고 국은 건더기가 소복이 쌓이도록 담아야 했다. 자반 조기는 밥, 국과 함께 나가야 했다. 그 후 남자들이 절을 하며 술을 올린다. 그 의식이 끝나면 밥과 국을 걷어들이고 물을 내와야 한다. 집안마다 제사를 지내는 순서와 과정도 조금씩 다르기에 실수라도 할까 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의식이 다 끝나고 나면 많은 음식들을 먹기 좋게 덜어 내 식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상을 차린다. 다 먹고 나면 과일과 차를 내어 놓는 과정까지 내 손은 쉴 틈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들을 나누고 용기에 담아 보관하면 끝난 줄 알지만 일일이 다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소소한 할 거리들이 많은 것이 제사였다.

며느리 입장에서 보는 제사는 난센스 그 자체였다. 나는 시댁 조상들을 기리는 제사가 며느리들 손에서 시작되고 마무리 되는 현실에 부당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며느리인 내가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시어머니는 큰일이 나는 것처럼 펄쩍 뛰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송하다를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했고 마음이 편치 않아 어머니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집안 사정상 갑자기 제사를 넘겨받게 되었다. 몇 년간은 직접 제사의 모든 과정을 준비했고 마무리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수고는 늘 내 몫이었고 제대로 거들지 않은 남편과 싸움은 필연적이었다.

가문을 위한 전통적 의례라는 이름 하에 여성의 노동만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 제사 문화라고 생각했다. 또 가족 중 특히 며느리가 그 수고에 동참하지 못하면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시어머님의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제사 열전은 언제나 빨간 대야에 가득 채워 이고 온 제사 음식들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말을 다 쏟아 낼 베짱이 없었던 나는 집안의 평화를 위해 참고 참으며 묵묵하게 17년간 전을 뒤집고 탕국을 끓였다. 결혼 후 명절은 더 이상 즐거운 연휴가 아니었다. 명절에 북적이는 공항 모습을 뉴스로 보며 '조상 복은 공항에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부모님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그 선언에는 명절 후 알려지는 부정적인 뉴스와 차례를 지내지 않는 동네 이웃들의 공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고생 뒤에 오는 낙이 것인가?

명절이 즐거운 며느리

배달 초밥 지난 명절에 시켜 먹은 음식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 아버님이 드시고 싶으셨던 족발 등을 시켜 한끼를 먹고 즐겼다.
▲배달 초밥 지난 명절에 시켜 먹은 음식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 아버님이 드시고 싶으셨던 족발 등을 시켜 한끼를 먹고 즐겼다. 한선아

그렇게 시댁은 작년 설부터 명절 차례를 없앴다. 기제사 역시 한번으로 합쳤다. 며느리인 나는 제사 탈출이라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명절에 시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졌다. 오래 된 집안의 관습을 하루 아침에 없애기 힘드셨을 것이라 생각하니 큰 결심 해주신 시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제사 대신 맛있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급진적인 발전까지 보이며 꿈에 그리던 평등한 명절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집안 여자들도 앉아서 여유 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제사라는 짐이 사라지자 명절은 의무가 아닌 재충전을 할 수 시간이 되었다.

당연히 남편과 싸울 일도 없어졌다. 올해 추석은 긴 연휴가 있어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조상님들 역시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낸 음식 보다 가족들 모두 즐겁고 상처 없는 명절을 보내기를 바라실 거라 생각한다.
#명절 #추석 #제사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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