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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09.13 18:50수정 2025.09.1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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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은 어떤 감정들을 느꼈는지. 고마움, 기쁨, 뿌듯함, 신기함, 재미있음, 걱정스러움, 부끄러움, 불안함, 그리움, 실망스러움, 서운함, 우울함, 미안함과 같은 감정이었는지, 아니면 여기 쓰여있지 않은 또 다른 감정들을 느꼈는지.
이름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 책표지
월북
얼마 전 도서관에서 친구가 추천한 <슬픔에 이름 붙이기>(2024년 11월 출간)라는 제목의 책을 빌렸다. 슬픔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이름 없는 감정에 대한 책이라 조금 놀랐다. 이 책에서는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정에 이름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책 소개 부분만 읽고도 가슴이 뛰었다. 요약하자면, 책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상의 한계다'라는 말처럼 언어는 우리 인식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 자체의 결함을 인식하기 어렵다. 단순하고 확실한 개념에는 새로운 이름을 쉽게 붙여주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아 언어에 거대한 맹점이 생겨난다. 그러나 원한다면 우리가 그런 공백을 메울 새로운 언어적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예전에 '썰렁하다'란 말이 유행할 때 생각이 났다. 그전에는 안 웃긴 상황에서 '썰렁하다'란 표현을 하지 않았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당시 MBC의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재미없는 개그를 하면 파트너인 다른 개그맨이 쇼트트랙 복장을 하고 '릴레함메르'를 외치면서 '썰렁하다'라는 말을 했다.
이 표현은 금세 유행어가 되었는데, 당시 우리 담임 선생님은 이 말을 무척 싫어하셨다. 자신이 무슨 얘기만 하면 학생들이 "썰렁하다"고 해서 면학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며 그런 이상한 말은 쓰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유행어가 없어지기는커녕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쓰인다. 누군가 농담을 했는데 웃기지 않아 모두 머쓱해지는 상황을 '썰렁하다'란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너무나 효율적이고 명쾌하다.
어떤 이름 없는 감정이나 상황이 나올지 기대하며 <슬픔에 이름 붙이기> 책장을 넘겼다. 처음 기대와 달리 사전 같은 구성에 점점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됐다. 그러다 "맙소사" 하는 감탄사와 함께 웃음이 터지는 단어를 발견했다.
프로럭턴스(proluctance) : 고대하던 무언가(중요한 편지의 개봉,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와의 만남,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읽기)를 피하려는 역설적인 충동. 그것을 하기 적당한 정신 상태가 되길 영원히 기다리며 행복한 기대감을 최대한 부풀리게 된다. - 책 p.79
이런 감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야구 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야구가 없는 월요일에는 헛헛함을 느끼며 화요일 저녁 6시 반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화요일 저녁 6시 반이 되면, 바로 TV를 틀거나 관련 앱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음, 지금 야구를 하고 있겠군' 하고 생각하며 어딘가 우리 팀의 야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 먹을 음식을 챙기고, 소소한 집안일을 천천히 마무리하며 내가 딱 중계를 틀었을 때 몇 대 몇의 스코어일지 상상한다. 그렇게 행복감을 만끽하다 중계 화면을 켠다.
그렇게 화요일 저녁 6시 반만 기다렸으면서, 대기하지는 못할망정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감정을 표현해 주는 말이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자

▲ '연장10회'라는 말을 만들어보았다.
punttim on Unsplash
요즘 고민 중인 이름 없는 상황 하나가 더 떠올랐다. 나는 에너지가 많지 않은 사람이라 전날 다음날 일정을 미리 계획한다. 누군가와의 약속도 끝나는 시간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하루 에너지를 잘 분배할 수 있다.
친구들과 만나기 전, 집에 가야 할 시간을 미리 이야기하곤 하는데 가끔 친구들은 '몇 시에 가야 한다고 미리 말하는 게 서운하다', '넌 우리가 소중하지 않냐'라고 하기도 한다. 오해다.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의 문제다. 가끔 친구들의 성화로 예상 시간을 넘기기도 하는데 그 경우, 나의 에너지는 다 바닥나 이전처럼 경청할 수도, 반응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예상 시간을 넘어서서 에너지가 바닥나 집중력 발휘가 어려운 상태를 설명하고 싶다. 영어와 한문을 섞어가며 새로운 말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 속 야구 경기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정규 이닝 이후 벌어지는 연장전이다. 팀의 마무리 투수가 9회에 나와 열심히 던지고, 야수들도 대타 선수로 바꿔가며 여러 전략을 구사했지만 정규 이닝인 9회 안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연장전을 치르는 선수들의 체력도, 멘털도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 내가 이름을 짓고 싶어 하는 상황이 바로 연장전에 막 돌입한 '연장 10회'인 것이다.
난 친구들에게 "얘들아, 나 지금 완전 '연장 10회'거든" 하고 말하는 상상을 한다. 곧바로 상상 속 친구들의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 기왕 연장전 한 김에 연장 11회까지 하고 가(KBO에서 연장전은 11회까지다)."
얼마 전, 야구를 보는데 야구를 보며 종종 느끼는 감정이 또 북받쳐 올라왔다(지난 9일). 이 감정은 '안 좋은 결과가 있을 게 뻔한데도 희망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가보는 마음'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탱을 참으며 끝까지 경기를 본다.
거의 고행 수준이다. 경기 종료 시 점수는 1대9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표현은 너무 결과 중심적이다. AI와 대화를 했더니 '낭만적 망상', '미련집착', '알면서도병', '비극적낙관'... 이런 단어를 내놓는다.
이런 감정, 다들 한 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다른 이들은 이런 감정에 어떤 이름을 지을까, 사뭇 궁금해졌다. 내 옆에 딱 붙어서 내 감정을 읽어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잘 살피고 이름 없는 감정에는 이름을 붙여보자. 위에서 소개한 책을 참고해도 좋고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보며 힌트를 얻어도 좋겠다.
'내 언어의 한계가 세상의 한계'라고 했으니, 그렇게 새로운 단어가 쌓이면, 내 세상도 조금은 넓어지지 않을까.
슬픔에 이름 붙이기 (어나더커버) -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
존 케닉 (지은이), 황유원 (옮긴이),
윌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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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나 지금 야구 10회 연장전이거든" 무슨 뜻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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