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소통 플랫폼에 올라온 '간병비 부담 해소를 위한 보호자 없는 병원 전면 실시' 화면
대한민국
생명을 살리는가, 보호자를 구하는가
TRS는 데이터를 통해 성한의 자살 확률이 95%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제 어머니의 간병이기에 손을 쓸 방도가 없다. 유일한 자식이 어머니를 돌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7년 넘게 차도가 없는 어머니가 병상을 털고 일어서길 바랄 수도 없다. . 환자를 돌보는 것이 본래의 임무지만, 이 돌봄이 보호자를 파멸로 이끄는 역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TRS는 병실에 붙은 안내 문구를 따라 '생명을 살리는 전화'를 건다. 수화기 너머에는 인간 신부인 최 신부가 있다. TRS는 "환자를 살리느라 보호자가 죽게 생겼다"며 상황을 설명하고,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는 판단을 전한다. 기계적 논리에 따른 결정이지만, 신부는 그럼에도 살인을 해선 안 된다는 인간적 윤리를 말한다.
그러나 TRS는 결국 어머니의 인공호흡기 전원을 끄고 만다. 성한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머니는 숨을 거둔 뒤였다. TRS가 남긴 영상으로 진상을 알게 된 성한은 분노에 휩싸여 로봇을 거칠게 내리친다. 이는 너무도 인간적인 반응이다.
소설은 이후 TRS의 처분, 성한의 삶의 변화,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최 신부의 내면까지 그려내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단순한 공상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압축한 미래 예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소설은 이상 행동을 보이는 간병로봇 TRS의 운명과 성한의 뒤바뀐 미래,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최 신부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SF, 즉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장르답게, 실재하는 과학 이론과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기술을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와 그 안에서 벌어질 갈등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이 과학문학상 수상작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역시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체하는 노동, 그로 인한 가치 충돌과 사회적 혼란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공상에 그치지 않는다. 김혜진 작가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 즉 간병에 따른 우울과 고립, 폭력, 연명치료의 딜레마, 그리고 가족 간병의 무거운 굴레와 이를 보조해야 할 사회의 책임까지 소설 속에 녹여냈다.
지난 '독서만세' 274회에서 다뤘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은 간병인의 위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간병 가족' 보도가 밝힌 불편한 진실, 즉 효자와 효부마저 살인자로 내몰리는 충격적인 상황이 한국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이 책은 재확인해준다.
실제 간병인과 만성질환 환자들이 겪는 극심한 우울과 정신적 질병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급성질환보다 만성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난 선진국인 한국에서, 간병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이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정부와 사회의 모습은 얼마나 성숙한가(관련기사:
이재명과 김문수 대선후보의 공통 공약에서 알 수 있는 것 https://omn.kr/2dtqn).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의 성한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비로소 웃음을 되찾는다. 그를 죽음 대신 삶으로 이끈 것은 허구의 소설적 장치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현실을 강하게 일깨운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간병의 무게를, 그리고 TRS와 같은 보조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를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벅찬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로 끝나선 안 되며, 소설 속 비극이 현실이 되기 전에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간호중 포스터
찬란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2021년 민규동 감독에 의해 영화 <간호중>으로도 제작되었다. 이유영, 예수정, 염혜란 등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다채로운 이야기들에 비해 아쉽게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너무 현실적이고 아픈 주제라 일부에선 외면당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다.
글 서두에서 언급한 국민소통 플랫폼의 정책제안, '간병비 부담 해소를 위한 보호자 없는 병원 전면 실시'는 매우 타당하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전국 확대 및 의무화, 간병 인력 국가책임제 도입, 병원 인프라 및 인력 지원, 건강보험 내 간병비 재정지원 확대, 그리고 평가 및 모니터링 제도화 등 주요 정책들은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제는 이를 실천할 때다. 공약이 공약으로만 끝나고, 간병과 의료를 단지 비용 문제로만 다루는 일이 더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이 정책제안이 널리 읽힐 수 있도록 퍼뜨려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공동체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관내분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 로그 + 라디오 장례식 + 독립의 오단계
김초엽, 김선호, 이루카, 오정연, 김정혜진 (지은이),
허블, 2018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공유하기
환자 돌보는 로봇, 웃음 잃은 인간... SF소설이 경고한 간병의 현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