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웅보전 월대 아래에서 올려다 본 사리탑. 단순하지만 묵직함을 느끼게 하는 조형미다.
박배민
정혜옹주는 박종우(옹주가 죽고, 후에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일등공신이 된는 인물)라는 인물과 혼인했으나 결혼 5년 만에 요절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은 옹주의 죽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정혜 옹주(貞惠翁主)가 돌아갔다. (중략) 임금(세종)이 고기반찬(肉膳)을 들지 않고, 조회와 저자를 사흘 동안 정지시키고, 부의로 쌀·콩 1백 석과 종이 1백 권을 내리고, 관(官)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 세종실록26권, 세종 6년 10월 6일
당시 초혼 연령을 고려하면, 옹주는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왕실 여성이라도, 그것도 옹주를 위한 추모 탑이 별도로 세워지는 사례는 드물었기에, 이 승탑이 품은 사연은, 정혜옹주의 안타까운 생애를 넘어, 조선 초기 왕실과 불교의 관계, 여성의 위상, 불교 조형의 미감을 함께 전해준다.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예불 시간 동안 문을 닫았던 삼정헌이 다시 열릴 시간이었다. 애환이 서린 두 보물을 뒤로하고, 이제는 살아있는 역사가 숨 쉬는 삼정헌으로 향했다.
시(詩)와 선(禪)과 차(茶)의 공간, 삼정헌
수종사는 경내에 '삼정헌'이라는 다실을 운영하고 있다. 보통의 사찰에서 운영하는 카페와는 사뭇 다르다.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지만, 차값도 받지 않고, 차를 따로 내어 주지도 않는다. 자리마다 다기만 놓여 있을 뿐이다. 뜨거운 물을 부으며, 차를 우리고, 찻잎으로 설거지하는 일까지 참배객 스스로 해야 한다.

▲ 차 우리기부터 정리까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박배민
자리에 앉아, 차를 우리며 찬찬히 내부를 둘러본다. 벽면에 '자연방하(自然放下)'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네 글자가 다실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 자연방하. 분별하지 않고 본래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박배민
'다관'이라 불리는 손바닥만 한 도자기 주전자에서 찻잔으로 조심스레 차를 붓는다. 차향을 맡으며, 미리 공부해 온 삼정헌의 내력을 떠올려 본다. 조선 후기, 정약용과 초의선사, 정조의 부마(사위) 홍현주 등 당대의 차인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짓고 차를 나누었다.

▲ 삼정헌과 뜰. ?비어 있음이 곧 채워짐이 되는 곳이었다.
박배민
정약용은 형들과 함께 수종사에서 과거를 준비했고, 유배 중에도 "호남의 400여 사찰보다 수종사가 낫다"고 말할 만큼 이곳을 그리워했다. 초의선사는 전라 해남에서 죽로차를 들고 올라와, 한양 문인들과 이곳에서 나누었던 순간을 이렇게 남긴다.
"수종사의 바람소리와 우레소리를 듣고 보니, 일체 세간의 온갖 악기 소리 따위는 소리도 아니었다. 수종사의 눈과 달빛을 보니, 세상의 온갖 빛깔들은 빛깔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수종시유첩'이라는 시집으로 남았다. 눈 덮인 겨울 산길을 따라 오른 그들, 찻잔을 기울이며 나눈 이야기는 지금도 삼정헌의 공기 속에 은은히 배어 있는 듯했다. 수종사는 그 시간들을 잊지 않고, 삼정헌으로 그 유산을 오래도록 우려내고 있었다. 차 한 잔이 남긴 여운을 품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삼정헌의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는 참배객들.
박배민
차 한 잔이 남긴 것
몇 년 전 처음 수종사에 올랐을 때는 그저 멋진 풍경에 감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간이 주는 의미, 역사가 남긴 향기, 그리고 차 한 잔이 가르쳐준 마음의 자세까지. 수종사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머무르는 곳이었다.

▲ 대웅보전 석등 넘어로 보이는 참배객
박배민
두물머리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이제는 보이는 것 너머의 깊은 울림을 함께 품고 내려왔다. 수종사의 차는 맛이 아니라 마음을 가르친다고. 그리고 그 가르침은 '자연방하', 자연스럽게 놓아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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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남긴 흔적을 찾아 다닙니다.
관광학을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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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400여 사찰보다 낫다" 다산 정약용이 사랑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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