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여수시 노형선박연구소에서 마광남 조선장을 찾았다. 그들은 어촌민속전시관에 보관 중인 완도 장보고축제에서 사용한 선박과 노를 살펴보고 있다.
완도신문
마광남 조선장은 전통 목선을 만드는 장인이다. 그는 자신의 청춘을 오롯이 '한선(韓船)' 복원에 바쳤다. 한선은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배로 근대까지 사용되던 선박이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지역 전통 배의 형태와 제작기술을 연구하고 복원했으며, 각 지역에서 기념으로 제작하는 거북선 모형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이름 없는 촌부가 아니다. KBS <역사스페셜>은 그를 두 차례나 집중 조명했고, 사극 영화의 전통선 제작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사회에서 그는 점점 잊히고 있다. 기능인으로서의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제도와 평가 기준은 그를 철저히 배척했다.
학계는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기술적 견해는 주류 학계와 다소 상반된 면이 있다. 이 때문인지 학계는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오히려 그의 기술은 필요한 만큼 이용한 뒤, 평가나 예우 없이 배제되어 왔다. 학계의 권위 아래 기능인은 도구일 뿐이었다.
전통 한선의 기술을 두고 학계는 오랜 논쟁을 이어왔다. 그 중 한 교수가 내놓은 주장은 전국의 전통 조선기술 보유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 교수는 "오늘날 전해지는 한선 기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계량한 결과"라고 발표했다. 이 발언은 해양연구기관과 주류 학계에 빠르게 퍼졌고, 그 여파로 전국의 기능인들은 무형문화의 주체가 아닌 오류의 전파자로 몰렸다.
이 한 마디는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낳았다. 수십 년간 현장에서 전통 기술을 몸으로 전수해 온 장인들은 연구의 대상이 아닌 정정의 대상이 되었고, 후계자 양성은 더욱 어려워졌다. 마광남 조선장 역시 이 흐름을 피하지 못했다. 후계자는커녕 생계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상황에 놓였다.
전통 기술이 학문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생긴 권력의 일그러진 단면이었다. 학계는 기능인을 배척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쌓은 경험을 자료화하여 자신들의 연구업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전통 기술이 소멸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 양 주류학계의 몇몇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는 모습은 씁쓸함을 더한다. 그런 연유로 완도선 40주년 국제학술대회가 완도군에서 열렸지만 마광남 조선장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비참한 현실이다.
완도군은 빛나는 해양역사와 선박, 항해술 등 다채로운 해양문화를 품고 있다. 그러나 지금 완도는 점점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노 젓는 기술도, 배를 만드는 기술도, 이를 전수할 사람도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학계와 행정이 규정한 제도적 기준은 지역의 전통을 재단하고 배제하는 도구로 작동해 버렸다.
무형문화재는 기록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끝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경험 속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무대 뒤로 이미 밀려나 있다. 그들의 손 기술이 만들어낸 우리의 전통문화는 오히려 현대인이 추구하는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마광남 조선장처럼 평생을 기술 하나에 바친 이들이 더 이상 '촌부'로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학계와 행정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기능인을 기능인으로서 존중하고, 그들의 기술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면서도 문화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완도의 바다가 더 이상 과거 속의 이야기로만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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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해양 정체성 지키는 마지막 조선장, 학계가 그를 외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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