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기도회에서 발언하는 김경자.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김경자(당시 21세)는 1981년 7월 28일 출근하자마자 반장에게 "컨베이어벨트 속도를 조금만 늦춰 주세요"라고 건의했다. 반장은 대뜸 김경자의 얼굴과 가슴을 손바닥과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주변에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변했을 뿐 누구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경자는 수없이 날아오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람 살려요"라고 외치며 3층 작업장에서 1층으로 달아났다. 1층의 경비노동자들은 이를 목격하고도 수수방관했다. 김경자는 뒤쫓아온 반장에게 또다시 폭행을 당해 기절했다. 그제서야 그는 청주의 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병원에 입원한 김경자는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고 하혈하며 횡설수설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회사 측은 이날 오후 7시 청원군 남일면 대머리(현재의 청주시 방서동) 김경자 집에 연락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2시간 만이다.
몸이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자 8월 12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청주에 다시 내려왔을 때도 김경자의 몸은 온전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개인의 폭행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를 만난 김경자 아버지 김교영은 회사에 강하게 항의했다. "컨베이어벨트 속도 때문에 발생한 폭행이 어떻게 개인적인 것입니까?"
회사 관리자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폭행을 당하는 일은 1950, 1960년대만의 일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럭키 청주공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감 없다고 해고해놓고선... 100명 새로 뽑은 회사
회사로부터 폭행에 대한 보상금 85만 원을 받았지만 김경자는 럭키공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1982년 4월 2일 출근한 새 직장은 튜브형 얼음과자 '아이차'를 생산하던 삼립식품. 김경자가 친구들과 청주산선에 놀러 간 것은 그해 6월이었다. 그곳에서 조순형 전도사에게 매듭과 꽃꽂이를 배웠다. 뭐를 배우든 신기하고 재미있던 20대 초반의 여성 노동자였다.
그렇게 몇 차례 청주산선에 다닌 뒤였다. 회사 관리자가 김경자 일행을 호출했다. "어디 갔다 왔냐, 뭘 가르쳐 주더냐, 누가 가자고 했냐?"라는 질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회사 측에서는 "청주산선이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1982.3.18.)을 일으킨 빨갱이와 연계된 세력"이라고 했다. 서부경찰서(현재 청주 흥덕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회사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김경자에 관한 정보를 캐냈다.
"불황이라서 불가피하게 인원을 감축한다"며 김경자가 속한 부서를 포함해 2개 라인을 구조 조정했다. 사측은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구조조정이라며, 해고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노동조합도 묵묵부답이었다. 일감이 없어 2개 라인을 폐쇄한 삼립식품은 김경자가 부당해고된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신규사원 100명을 채용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입장이었던 김경자는 해고 후에 일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콘돔과 수술용 의료장갑을 생산하던 서흥산업에 1982년 10월 4일에 취직했다. 서흥산업의 작업환경도 녹록지 않았다. 의료용 수술 장갑이 눌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 돌가루를 뿌렸다.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돌가루에 노출됐다.
김경자는 돌가루와 씨름한 지 20일 만에 새로운 부서로 전출됐다. 2인이 작업하던 공정에 김경자 혼자 일하게 했다. 회사 관리자들은 김경자를 작업시간 내내 감시했다. 심지어 식당과 화장실에도 졸졸 따라다녔다. 피가 마르는 듯했다. 회사 측이 김경자의 이력을 눈치챈 것이었다.
"사표 써!" "왜요?" 관리자의 지시에 김경자가 대꾸했다. 회사 관리자는 회사 종업원 226명이 전부 김경자를 싫어한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같은 생산부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싫어한다면 모를까,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전부 싫어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김경자를 싫어한다는 226명의 명단이 공개된 것도 아니고, 정당한 절차를 통한 해고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김경자는 서흥산업 정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회사 경비와 관리자들이 출근하려는 김경자의 몸을 밀쳤다. 그 과정에서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몸싸움에 지친 그가 회사 담벼락에 서 있는 모습은 쓸쓸하기만 했다. 하지만 김경자는 그때 '노동자의 인권이 짓밟히는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며칠 후 과장이 다방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것 갖고 그만둬!" 과장이 건넨 흰 봉투를 열어보니 현금 200만 원. 당시에 노동자에게는 엄청난 액수였다. 자신의 약 20개월 치 월급을 과장의 얼굴에 던졌다. 자본의 유혹을 전면 거부한 것이다.
결국 서흥산업에도 돌아갈 수 없었던 김경자는 리어카에 귤을 싣고 다니며 노점상을 했다. 이때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의 호출이 있었다.

▲노점상길거리에서 귤을 파는 김경자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씨알의 소리>를 읽던 청년
"경자야. 신탄진에 가자!" 정진동과 조순형이 머리를 맞대고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영역을 신탄진과 대전까지 넓히자고 이야기를 한 것은 1983년 3월이었다. 당시에 대전에는 도시산업선교회나 전문적인 노동운동 단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신탄진과 대전에서 노동 상담을 하러 청주도시산업선교회로 오는 형편이었다. 오는 이도 불편했고, 상담을 하는 이도 청주에서 대전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렇게 해서 신탄진 주택 2층에 전세금 250만 원짜리 사무실을 얻은 것은 1983년 4월 18일이었다. 김경자는 충남방적에 입사했다. 김경자는 신탄진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회사로 출퇴근했다. 조순형은 청주에서 출퇴근을 하며 신탄진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조순형이 새로운 활동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분주할 때,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새로운 실무자를 물색했다. 정진동 혼자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실무자를 거론하면서 정진동의 머릿속에 금방 떠오른 청년이 있었다.
1978년 봄에 주례를 부탁하러 온 이유근이었다. 그 청년은 평소에 정진동을 존경했다며 주례를 부탁했고, 정진동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것을 계기로 이유근은 청주산선을 다녔다. 함석헌, 문익환, 백기완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강연에도 빠짐없이 참석한 터였다.
청년 이유근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와 정진동에 흠뻑 빠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청원군 북일면(현재의 청주시 내수읍) 정상리에 살던 이유근의 아버지 이규영은 마을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사상계>를 읽던, 깨어있던 이였다. 시골 사는 농민이 <사상계>를 읽는다는 것은 당시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이유근은 젊은 시절부터 <동아일보>와 <씨알의 소리>를 구독했고, 청주의 중고책방을 다니며 지식의 목마름을 채웠다. 청주중학교와 청주농고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 이유근은 아버지의 대를 잇는 깨어있는 청년이었다.
동아일보와 백지 광고

▲감사문동아일보의 언론자유수호운동에 격려금을 보낸 이유근에게 보낸 감사문
이유근
"믿을 것이라곤 오직 동아뿐이군요."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광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것은 1974년 1월이었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 정상리 청년들의 계 모임인 '정우회'에서 동아일보 격려 광고에 참여한 것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비상계엄령을 발포하고 국회 해산과 더불어 유신헌법을 발효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식인·종교인들이 저항하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여러 번의 '긴급조치'를 취했다. 수많은 지식인이 장기형을 받는 상황에서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 사방이 얼어붙은 '겨울왕국 시대'였다.
이러한 언론보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발했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 수호대회'를 열었다.
그해 12월 20일부터 광고주들의 광고 해약이 붐을 이뤘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이었다. 결국 광고란이 백지로 나가게 됐다. 그러자 전국의 시민들이 <동아일보> 격려 광고에 동참했다. 격려 문구와 더불어 후원금(격려금)을 보낸 것이다. <동아일보> 광고면은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는 전국 시민들의 응원글로 넘쳐났다.
'정우회' 총무를 보던 이유근은 계원들에게 "<동아일보>가 광고 탄압을 받고 있어. 격려금을 보내자!"라고 제안했다. 평소에 총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지역에서 신뢰를 받고 있던 이유근의 제안에 이의를 다는 회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식이 더욱 높아진 이유근에게 <씨알의 소리>와 <신동아>는 주요 정보 공급처였다. 특히 <씨알의 소리>에는 정치·사회·문화 등 각계의 진보적인 목소리가 실렸다. 노동자·농민의 생존권 투쟁도 생생히 전했는데, 청주에서 민중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이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이렇게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접했던 정진동을 직접 대면한 것은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열성 신도가 된 이유근은 1983년 조순형의 빈자리에 새로운 일꾼으로 채용됐다.
소가죽을 구워 먹는 현실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로 채용되면 노동 현장에 취업하는 게 필수 과정이다. 이유근은 조광피혁에 입사했다. 이유근의 북일초등학교 선배이자 청원군 북일면 오동리(현재의 청주시 오동동)에 살던 서부경찰서 정보과 조OO 형사가 이유근의 조광피혁 입사 정보를 수집했다.
그때부터 이유근은 조광피혁에서도 모두가 꺼리는 부서로 뺑뺑이를 돌았다. 가죽을 깎아내는 부서, 수입한 원가죽을 대형 화학통에 담아 부드럽게 한 후 털을 벗겨내는 원피반, 가죽을 말리는 건조반 등이었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죽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열과 악취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소가죽 원단을 구워 먹기도 했다. 소가죽 원단을 구워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1980년대라고는 하지만 배고픈 노동자들이 비일비재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이런 최악의 노동환경에서 이유근은 1년간 공장 생활을 했다. 1987년까지 실무자로 정력적으로 활동을 하던 이유근은 청주시 내덕동·운천동·송정동 3개 지역 주민싸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수 차례의 연행과 구속을 당했다. 그는 1988년도부터 충북 기독교농민회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

▲이유근과 김경자우측으로부터 정진동, 김경자, 두사람 건너 뛰어 이유근
청주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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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속도 좀 늦춰주세요", 이후 벌어진 끔찍한 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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