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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정리 공사가 돈벌이 수단이라니

[정진동 평전] 해평들·궁들 부실 농지정리 공사와 농민들의 투쟁

등록 2025.01.26 10:10수정 2025.01.2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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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끝이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해평뜰(해평들의 방언)에 서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든다. 그만큼 옥산면 호죽리 농민들에게는 해평들이 주민들의 호구 수단이자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1987년 이른 봄 해평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은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해평들이 풍요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재난의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 해인 1986년 그곳에서의 농사는 사상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논에서 빠지는 물이 배수로로 나올 때,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처럼 되고, 배수로는 물이 하류로 원할하게 빠지지 않았다. 복토(覆土)해도 시원찮을 논에 바닥을 긁어내 일부 논에서는 생수가 치솟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윤병로와 동래정씨 문중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경작하던 토지인 위토(位土)를 농사짓던 정풍영은 농지정리 개발업체가 복토를 한다고 해, 논흙을 파가게 했다. 그런데 논바닥을 너무 깊게 파 생수가 치솟았고 폐농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정작 윤병로와 정풍영의 논에서 파간 흙은 마을 논의 복토용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팔아 개발업체가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바다

수문 공사 배수로 부실 공사 모습
수문 공사배수로 부실 공사 모습청주도시산업선교회

장마철에는 논물이 배수로로 빠져나가지 않아 모들이 둥둥 떠다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86년 농사는 예년의 2/3에도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논농사에서는 치수가 제일 중요한데, 치수 실패로 옥산면 호죽리 해평들에서는 농사가 엉망이 됐다. 그런데 사태의 원인은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였다.

100세대 600여 주민들의 삶의 토대인 호죽리 해평들은 850마지기(17만 평, 56만1000㎡)로 연 3100가마의 벼를 생산했다. 호죽리 농민들이 1년 동안 논농사를 지어 생활비와 자식들 교육비를 충당했다.


정부에서는 농촌 현대화와 농가소득 확대라는 목표 아래 1985년 해평들 농지정리 공사를 시작했다. 국비 2억2000만 원, 농민 자부담 5000만 원, 총 2억7000만 원을 들인 공사였다. 공사의 핵심은 농지정리와 배수로 공사였다. 공사는 1985년 10월부터 1986년 5월까지 진행됐다.

공사를 하다 보면 정확한 측량을 통해 배수로 직선화 공사가 이뤄진다. 배수로 공사를 하면서 편입되는 땅은 농민들의 손실로 이뤄진다. 이것을 감보율이라고 하는데, 전체 17만 평 중에서 2만 평이 여기에 속했다.


약 9%의 토지가 축소됨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정부 시책에 순순히 응했다. 이것이 결과론적으로는 농가소득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런데 이 믿음은 결국 깨졌다.

인재의 핵심은 배수로 부실 공사였다. 배수로 수문의 콘크리트가 부서져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곳곳에서 철근이 노출되기도 했다. 논과 배수로의 연결통로인 수멍 공사도 마찬가지였다. 수멍 곳곳에 모래가 쌓여 원활한 배수를 막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수문을 조절할 수 있는 곳까지 가는 다리를 놓지 않아 인명사고의 위험성이 상존했다. 배수로와 논둑의 제방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논둑이 무너져 논이 물바다가 되었다. 배수로 공사 결과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런데 감독기관인 청원군청은 제방 공사에 대해 준공 검사를 내줬다. 개발업체의 탐욕과 감독기관의 태만이 만들어 낸 농지정리 공사는 결국 자본의 돈벌이 수단이 돼버렸다. 1986년도의 인재를 경험한 주민들은 1987년 논농사를 앞두고 밤을 설쳐야 했다.

청와대

며칠간 밤을 설친 농민들은 자신들의 동향 출신인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를 찾았다. 농민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은 정진동은 진정서를 작성했다. "농민 전체 서명을 받아 오세요." 다음날인 1987년 3월 5일에 호죽리 농민대표 3명이 주민 전체의 서명을 받아왔다. 농민들의 상황은 그만큼 절박했다.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1987년도 농사도 망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정진동은 3월 6일 호죽리 현지답사를 한 후 청원군수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청원군수가 현장에 나와 실태 파악을 했지만, 관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했다. 3월 15일 농민 30여 명이 청주산선에 왔으나 청원군청 농지계장과 경찰들의 제지로 대표자 8명만 정진동을 면담했다.

농민들은 재차 청원군청에 진정서를 보냈다. 농민들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배수로 수문 공사를 다시 해달라. 수문 조절할 수 있는 곳까지의 다리를 설치해달라. 배수로를 깊이 파서 배수가 원활하게 해달라, 배수로 옆에 제방을 쌓아달라. 생수가 치솟은 논에 복토를 해달라. 환지(換地)를 공평하게 해달라, 1986년 농사 손실액을 보상해달라."

농민들이 청원군에 진정서를 보낸 다음 날인 3월 17일 청원군수로부터 회신이 왔다. "가능한 해결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정은 바로 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했다. 특히 매주 일요일에는 청주산선에서 예배를 봤다. 정진동은 농민들에게 해평들 문제와 관련해 교육도 했다. '해결하겠다고 노력하겠다'는 회신에도 미동조차 없는 청원군청에 2차 건의서를 보냈다. 정진동은 '잘못된 곳은 고치고, 손해 본 것은 배상하고, 불공정 환지는 다시 공정하게 분배하라'고 썼다.

해평들 농민 시위 옥산면 호죽리 해평들 농민들의 시위 모습
해평들 농민 시위옥산면 호죽리 해평들 농민들의 시위 모습청주도시산업선교회

농민들은 여론의 공론화를 위해서 청원군청 이외에도 탄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4월 8일 충북도지사, 농림수산부장관, 문화방송사, 연합통신사와 청와대에 탄원서를 발송했다.

농민들의 싸움은 지칠 줄 몰랐다. 4월 16일 탄원서를 청원군수, 옥산면장, 우성건설, 대명건설(우성건설로부터 공사를 하청받은 업체)에 보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 4월 18일 청와대로부터 회신을 받았다. 부실 농지정리 공사를 다시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전년도인 1986년도 농사 손실액 보상 문제를 포함한 일부 요구는 관철되지 못했다. 하지만 농민들의 완전한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호죽리 농민들이 정진동을 찾아온 지 49일 만의 일이었다.

수세(水稅)

궁들 공사전 모습 미원면 궁들 배수로 공사 전 모습
궁들 공사전 모습미원면 궁들 배수로 공사 전 모습청주도시산업선교회

1989년 수세 통지서를 받은 청원군 미원면 내산리 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1985년도 청원군청에서 농지정리 공사를 한 이래 한 번도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는데 물세(수세)를 내라니 황당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공사는 1985년도에 했는데, 수세가 1984년도분이 나오기도 했다. 이 황당함은 분노로 이어졌다. 내산리 2~3구 주민들은 1989년 1월 10일 청원군농민회에서 개최한 '수세 거부' 집회에 참석했다. 4년 치 수세를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내산리 주민들의 답답함은 수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부실 농지정리 공사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다. 2년 전 옥산면 호죽리에서 있었던 일과 유사했다.

1월 10일 수세 거부 집회에서 신흥제분 노동자 김태안 사촌 형이 제안해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를 찾아갔다. 1970년대 청주의 대표적인 노동쟁의였던 신흥제분 투쟁 경험이 농민들에게 전파된 사유였다.

농민들이 정진동에게 털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원 궁뜰(궁들)도 옥산 호죽리 해평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시책으로 농지정리 공사를 벌였다. 궁들 농민들이 자신들의 논 일부가 손실(감보)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말이다.

그런데 공사 결과는 허망했다. 공사 전에는 물을 마음대로 논에서 빼고, 배수로에서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공사 후에는 겨울철이 지난 후와 장마철이 지난 후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수멍이 모래와 흙으로 막혔기 때문이다. 또한 배수로가 무너져 논이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농지정리를 할 때 상류는 논바닥을 높게 하고 하류는 낮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된 공사 결과는 가뭄에 배수로에 흐르는 물을 보고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부 논은 물을 대지 못해 벼가 타들어 가고, 일부 논은 물바다가 됐다.

천렵 미원면 궁들 주민들의 천렵 모습
천렵미원면 궁들 주민들의 천렵 모습청주도시산업선교회

개발업체의 부실 공사와 청원군청의 감독 소홀이 낳은 인재였다. 이런 와중에 주민 중 일부는 환지 과정에서 농사짓기 좋은 땅을 불하받고, 복토도 넉넉히 받았다. 토지 개발위원으로 참여한 이들이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농민은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정진동과 농민들은 부실 농지정리와 수세 거부에 관한 탄원서를 청원군청과 청원농지개량조합 등에 보냈다. 1월 24일 청원농지개량조합으로부터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회신을 받았으나, 공무원들은 여전히 복지부동이었다.

1월 26일에는 청주산선에서 옥산면 호죽리 출신 정상봉 목사의 '인간의 권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미원면 내산리 농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2월 26일에는 정진동이 농림수산부 장관에게 건의서를 보냈다.

3월 7일 농지개량조합이 정진동에게 회신을 보냈다. "미원면 궁들 보 구역의 용배수를 위한 시설물 공사를 금년(1987년) 봄에 실시하겠다. 다만 3~4년 치 수세를 반환해달라는 것은 농촌 근대화촉진법에 의거해 부과한 것이기에 반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지난 수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농지정리 재공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해 4월 재공사가 시행되었다. 다행히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무리됐다. 농민들의 승리였다. 내산리 농민들이 정진동을 찾아간 지 두 달도 안 돼 문제가 해결됐다.

소풍

자축 미원면 내산리 주민들이 궁들 싸움에 큰 도움을 준 정진동에게 소주를 따라주는 모습
자축미원면 내산리 주민들이 궁들 싸움에 큰 도움을 준 정진동에게 소주를 따라주는 모습청주도시산업선교회

"목사님 한 잔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새마을모자를 쓴 내산리 주민이 정진동에게 소주를 따랐다. "목사님 한 말씀 하세요!"라는 외침에 내산리 궁들 변 냇가에 모인 주민들이 귀를 기울였다.

"올해 봄, 여러분의 투쟁으로 농지정리와 배수로 공사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앞으로 매년 풍년을 기대하며 건배합시다. 건배!" 참석자들의 박수 소리와 "건배" 소리가 어우러졌다. 1989년 10월 29일 주일예배를 마친 정진동과 조순형은 미원면 내산리 궁들 냇가로 갔다. 주민들이 벼 수확을 마치고 천렵을 하는데 초청된 것이다.

이 자리는 사실상 그해 봄의 투쟁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였다. 남성들이 족대로 물고기를 잡고 여성들은 어죽과 매운탕을 끓였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모인 이날의 잔치는 흥겨움 그 자체였다.

이홉들이 소주병과 댓병(대꼬리, 대병) 빈병들이 넘쳐났다. 내산리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가장 즐거운 소풍을 보낸 것은 1989년 10월 29일이었다.
#농지정리 #해평들 #궁들 #수문 #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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