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실수 공동 과제장옥산면 호죽리 화랑4H 청년회가 작성한 밤나무 과제장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호죽 2구 주민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됐다. 왜냐면 청주개발이 청원교육청으로부터 매입한 임야에 밤나무 700그루가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호죽리 이장 집에 있는 확성기에서는 '새마을 노래'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장은 "오늘은 밤나무 심는 날입니다. '화랑 4H 청년회' 회원들은 삽과 곡괭이를 지참하고 모이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을 했다.
1972년 4월 7일 4H 회원들은 전날 파놓은 구덩이에 밤나무 묘목을 심었다. 이날 행사는 옥산면사무소와 청원군 농촌지도소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하에 이뤄졌다. 당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시행한 새마을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묘목은 정부의 무상지원 속에 행해졌다.
농가소득 증대라는 원대한 목표 아래 이루어진 밤나무 재배는 4H 회원들의 땀방울 그 자체였다. 수시로 거름과 비료를 주고 농약을 쳐야 했다. 호죽리 화랑4H가 작성한 '유실수(밤나무) 공동 과제장'에 보면 1972년 4월 6일 구덩이 파기, 7일 밤나무 심기를 시작으로 젓순 따기, 꽃따기, 밤송이 따기, 밤나무 복돋우기는 그해 9월 말까지 이어졌다. 월평균 2회씩 50가구 200여 주민들이 로테이션으로 농사를 지었다.
어린 묘목에서 밤이 수확될 수는 없는 법. 묘목을 심은 지 10년 되는 해인 1982년부터 밤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즉 밤나무 재배지가 골프장 개발로 인해 화산리 주민들의 대토용으로 매각되던 해인 1985년도에는 제법 굵은 밤알들이 열렸다. 4H 회원들의 농가소득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다. 그런데 자신들과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더군다나 밤나무 보상에 대한 어떤 합의도 없이 매각된 것이다.
주민들의 항의에 청주개발은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87년 9월 2일 주민 대표가 청주개발에 약속이행을 촉구했다. 그러자 청주개발 측은 밤나무가 호죽리 주민들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다.
주민들은 밤나무를 심을 당시 업무일지와 옥산면사무소의 확인서, 청원군 농촌지도소의 인정서를 제출했다. 이에 청주개발 측은 1988년 4월 30일까지 보상해주겠다고 각서를 써주었다.
6만원 vs. 5000원

▲골프장 사무실에 방화골프장 사무실에 방화. 중앙일보 1988.3.17 기사
중앙일보
약속한 보상 시일이 다가옴에도 불굴하고 청주개발 측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주민들은 본격적인 농사철이 되기 전에 보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988년 3월 16일 주민 90명이 청주개발(청주골프장) 현장사무소에 갔다. 전무는 자기가 "권한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청주개발의 대표는 별도로 있었지만 청주개발의 최대 주주는 임광토건 회장이기도 한 임광수였다.
그런데 소문으로 흘러나오는 얘기로는 밤나무 한 그루당 5000원을 보상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식재(植栽) 당시 묘목을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호죽리 주민들이 밤나무를 14년간 애지중지 키운 경비가 1/10도 계산되지 않은 것에 주민들은 분개했다.
주민들이 한 그루당 보상비로 요구한 내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인건비로 연인원 50명의 일당 8600원을 14년(1972년~1986년)으로 쳐서 602만 원, 비료값 14년 치 420만 원(연 30만 원), 농약값 14년 치 420만 원, 밤나무 가격 1050만 원(그루당 15만 원), 밤나무 예상 수확으로 연 1만5000원씩 700주를 4년으로 쳐서 4200만 원으로 계산했다. 총 배상 청구금액으로 6692만 원이 산정됐다.
백번 양보해서 밤나무 값을 뺀다 하더라도 5500만 원이 나온다. 한 그루당 7만8000원꼴. 하지만 이후 주민들은 요구안을 낮췄다. 비슷한 시기에 정부에서 오창~독립기념관 구간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는데 유실수 보상을 한 그루에 4만5000원씩 해줬다. 그 보상가를 감안해서 보상가를 낮추어서 그루당 6만 원을 제시했다.
그런데 청주개발이 제시한 보상비는 그루당 5000원으로 700주를 계산하면 350만 원에 불과했다. 주민들은 보상가 5000원은 화목(나무 땔감)값에도 못 미친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화를 억누른 주민들은 현금으로 보상을 해주지 못하면 마을 진입로 도로포장이라도 해달라고 요구했다. 개별보상이 아닌 마을 공동이익을 위해 요구안을 낮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주개발 측은 도로 포장비용에 2400만 원이 소요된다며 거부했다. 현금 보상 4200만 원의 57% 금액대인 2,400만 원도 거부한 것이다.
방화(?)

▲석방 촉구대회호죽리 밤나무 보상 및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 1988.3.27
청주도시산업선교회
1988년 2월 26일 호죽리 주민 50명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찾았다. 같은 옥산면 호죽리 출신 정진동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호죽리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터였다. 청주시청 청소노동자 문제, 신흥제분 문제부터 시작해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들의 문제를 자기 일처럼 나선다는 소문에 같은 고향 출신의 호죽리 주민들로서는 정진동을 찾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정진동은 찾아온 주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진정서를 작성해줬다. 그해 3월 13일 12시에 제43회 노동절 기념행사가 청주산선에서 열렸다. 방용석 전 원풍모방 노동조합 위원장이 강연을 했다. 이 행사에 호죽리 주민 80여 명이 참여했다. 행사를 마친 호죽리 주민들은 상당공원에서 "밤나무 값을 보상하라"며 집회를 하고 2시간 동안 청주 시내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거리 시위를 벌인 지 3일 후에 방화사건이 터졌다.
3월 16일 옥산면 호죽 2구 새마을 지도자 최영복과 3반 반장 박상철이 주민들과 함께 밤나무 보상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청주개발에 항의하기 위해 오창면 화산리를 찾았다. 주민 대표 자격으로 청주개발 사무소에 들어간 최영복과 박상철은 화가 극도로 치솟았다. 청주개발 측이 밤나무 한 그루당 5000원 보상안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것도 자기 권한 밖의 일이라며 청주개발 전무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14년간 자식처럼 키운 밤나무를 담벼락에 쌓여있는 장작처럼 취급하냐!"며 주민 대표가 화를 냈다. 홧김에 무의식중에 발로 찬 난로가 문제였다. 난로가 쓰러지면서 사무실에 불이 붙었고 사무실과 인근 창고 280평(924㎡)이 전소됐다. 창고에 있던 독일제 측량기계는 당시 5000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순진하고 마을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활동했던 청년 일꾼 최영복·박상철이 우발적으로 벌인 행동은 큰 사고로 번졌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건조물방화죄로 구속됐다.
서울상호신용금고
예상치 못한 방화사건으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호죽리 주민들의 투쟁은 흔들리지 않았다. 호죽리 주민들은 사건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매주 일요일 청주산선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청주 시내에서 선전전을 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3월 27일에는 주민 80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는 중에 경찰이 최루탄을 발포했다. 이 과정에서 호죽리 여성이 최루탄에 맞아 부상당했고, 청주산선 회원 남지희는 보청기가 깨졌다. 경찰의 진압에 주민들과 청주산선 회원들의 저항은 거셌다. 전경 방패 5개를 빼앗기도 했다.

▲몸싸움선전물을 빼앗는 전투경찰과의 몸싸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주민들은 밤나무 보상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투쟁을 동시에 벌였다. 끊임없이 선전전, 거리 시위, 탄원서 제출을 했다. 그해 4월 26일에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투표에 앞서 4월 17일에는 서원초등학교에서 청주시 을구 합동연설회가 열렸다. 호죽리 주민들은 자신들의 선거구는 아니었지만 밤나무 문제에 관심을 쏟고 힘을 모아준 김재수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서원초등학교로 갔다.
답답한 상황에 파열구가 생긴 것은 청주시 대성동에 소재한 서울상호신용금고 앞 시위였다. 청주개발이 서울상호신용금고에서 대출을 받아 골프장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터였다. 주민들은 플래카드를 걸고 매일같이 선전전과 시위를 했다. 이렇게 되자 신용을 중시하는 금융기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결국 청주개발이 백기를 들었다. 밤나무 보상금으로 2000만 원을 지급하고, 방화혐의로 구속된 두 사람에 대한 석방탄원서를 제출키로 했다. 당연히 방화로 인한 어떠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 8월 18일 선고공판에서 최영복·박상철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아 석방됐다.
마을 공동기금
애초의 보상요구안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주민들은 청주개발로부터 2000만 원을 밤나무 보상금으로 받았다. 주민들은 이 보상금 중 500만 원을 제외한 1500만 원을 호죽신용협동조합에 출자했다. 500만 원은 투쟁경비로 지출됐다. 주민들은 보상금을 개인들이 나눠 갖지 않고 마을 공동기금으로 적립했다.
마을주민들의 생활 개선과 복지기금으로 적립을 한 것이다. 이 기금은 수십 년간 불어난 이자로 인해 주민들에게 유용하게 쓰였다. 말 그대로 효자효녀 노릇을 톡톡히 했다. 주민들은 밤나무 보상 투쟁을 통해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꿈을 몸으로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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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때문에... 주민들 피눈물나는 '밤나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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