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모자경찰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주민들이 빼앗은 전경모자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피로에 지쳐 보이는 듯한 사람이 청주산선 문을 두드렸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다리에 총탄을 맞아 장애가 생긴 이었다. 임아무개(1948년생)는 1972년 인헌무공훈장을 받았음에도 국가로부터의 혜택이 형편없었다. 다리의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다며 정진동을 찾아온 것이다. 1983년 8월 초였다.
개인적 질병도 아닌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이를 국가가 외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진동은 사회 각계에 보내는 진정서를 작성했다. 8월 13일 <충청일보>에 '훈장까지 받은 상이용사가 원호 혜택 없이 살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임아무개의 사연에 가슴 아파하던 정진동은 그의 집을 수 차례 방문했다. 9월 13일 정진동은 청주시 강서동 용정리 바위배기 마을에 들어섰다.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 임아무개 집을 찾았다.
그의 집은 무척이나 초라했다. 가난한 기색이 줄줄 흘렀다. 그의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길 바라는 예배를 봤다. 이후부터 임씨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의 열렬한 신도가 됐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정진동으로부터 세례까지 받았다.
그런데 1984년 말 임씨가 정진동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목사님. 제가 누군지 아세요?" "임아무개지 누구야?" 너털웃음을 웃는 정진동에게 임씨는 폭탄선언을 했다. "저는 프락치입니다." 임씨는 정진동을 담당하는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의 동서였다.
1983년부터 시작된 내덕동·송정동·운천동 주민싸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임씨를 정진동에게 접근시킨 것이다. 임씨는 주일예배와 청주시 3개 지역 주민기도회에 적극 참여했다.
정진동의 발언과 투쟁 일정은 임씨를 통해 고스란히 서부경찰서 정보과에 입수됐다. 1년여간 프락치 활동을 한 임씨가 양심고백을 한 것이다. 무한한 애정으로 자신을 도와주는 정진동 목사를 더이상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진동은 눈물 콧물 흘리며 양심 고백하는 임씨의 어깨를 다독였다. 죄책감을 갖지 말고 교회에 계속 나오라고 했다. 자신을 혼쭐 낼 줄 알았던 정진동 목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은 임씨는 어리둥절했다. 눈물을 훔치고 바라본 정진동의 얼굴은 '참인간'의 그것이었다.
고막이 터지다
청주대학교와 청주시의 회유와 음모, 서부경찰서의 프락치 작전에도 불구하고 3개 지역 주민들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의 투쟁은 지속됐다.
3개 지역 중 가장 치열하게 싸운 곳은 송정동이었다. 관계 당국은 토지수용령에 해당하는 60~70세대의 토지 수용가를 평당 3만~4만 원에 책정했다. 당시 시세는 30만 원이었는데도 말이다. 송정동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보상가의 현실화와 개별 이주가 아닌 집단이주를 요구했다.
투쟁 과정에서 1986년에 주민 이시영(66), 이원영(59)이 구속됐고, 이충로, 박성래, 이중근, 이장근, 박혜순이 구류를 살았다. 3년간의 싸움을 통해서 평당 보상가를 7만~8만 원으로 인상시켰고, 봉명동 택지개발지구로 집단이주 요구를 관철시켰다.

▲송정동 철거철거반원들의 송정동 철거 장면
청주도시산업선교회
1986년 투쟁이 종료된 후 송정동 정사관 주민들이 청주산선으로 찾아왔다. 주민들은 맨손으로 오지 않고 선물을 가져왔다. 자신들의 문제해결에 도움을 준 정진동과 청주산선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들이 갖고 온 선물은 피아노였다. 피아노에 '송정동 주민 일동'이라는 흰 글씨가 쓰여졌다. 주민운동의 속성상 투쟁이 성공리에 마무리되기는 매우 어렵다. 주민들의 이해와 요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송정동은 주민들이 마음을 합쳐 똘똘 뭉쳤다. 그 결과 불충분하긴 하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주민과 청주산선, 충북EYC, 지역 성직자들의 연대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각계 단체와 지식인들의 지지도 있었다. 1984년 8월 23일에는 서울에서 안광수(경수산업선교회 목사)와 40여 명의 청년들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기도회를 마치고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100여 명의 시위대 중 8명이 연행되어 1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한길녀, 이유근, 신동석, 이춘화 등이었다.
함석헌, 백기완, 고영근, 문익환, 조지송, 인명진, 임채정, 김동완, 박형규가 지지방 문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백기완이 강연한 1984년 9월 29일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강연 후 시위에서 조순형, 한승수(청주대학교), 추승엽(충북EYC 회장), 차재남(꿈나무 유아원 선생)이 연행됐다. 특히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는 서부경찰서 정보과장 김〇선에게 맞아 고막이 터졌다.
온몸에 똥칠

▲솥단지철거 후 솥단지와 지게 등이 널부러져 있는 모습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고무통과 똥바가지, 고무장갑을 준비한 한길녀에게 청주산선 회원이 물었다. "그건 뭐에 쓰시게요?" "다 쓸데가 있어요." 한길녀 집 주변은 마치 비행기 폭격에 맞아 폐허가 된 것 같았다. 주택 및 토지의 강제수용정책에 주민들이 하나둘 정든 삶터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잠시 후 수십 명의 전경들이 한길녀 집을 에워쌌다. 이때 변소(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바가지에 똥을 담아온 한길녀가 전경들에게 똥물을 뿌렸다. "윽" 하며 전경들이 물러섰다. 그 와중에 서부경찰서 정보과장 김〇선의 모자에 똥 덩어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제야 똥바가지와 고무장갑의 용도를 알아챈 청주산선 회원들이 고무통에 똥물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고무장갑을 끼었다. 한길녀와 청주산선 회원들의 의지를 확인한 경찰들은 물러섰다. 1986년 4월 26일, 1차 강제 철거 작전의 실패였다. 27~28일부터는 충북 EYC 회원들이 합류해 철거반과 대치했다.

▲부서진 지붕부서진 한길녀 집
청주도시산업선교회
2차 작전은 1986년 4월 29일. 그런데 하필 그날은 청주산선과 EYC회원들이 '이문호 교통사고 사건' 재판 방청을 위해 법원에 간 날이었다. 한길녀 홀로 있는 집에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사복형사, 전경, 토지개발공사와 임광토건 직원 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6명의 철거반원이 문을 부수고 방 안으로 침입했다.
그들은 한길녀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면서 "그래도 〇〇 하나는 쓸 만하다" 등의 언사를 하면서 성추행을 했다. 그런 후에 온몸에 똥칠을 하고 40m를 끌고 나왔다. 이에 격분한 한길녀가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을 시도했으나 철거반원들에게 팔이 비틀려 저지당했다(청주산선 소장 선전물).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한길녀 남편은 아내와 함께 강제철거와 성추행에 대한 항의로 임광토건 택지개발 현장사무실에 들어가 복사기, 사무기기, 건물 3동의 유리창을 부수었다.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방청하고 있던 이들의 귀에 이 소식이 전해졌다. 조순형 등이 택시를 타고 긴급히 현장에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거의 마무리 중이었다.

▲임광토건 사무소운천동 주택단지 개발에 나선 임광토건 사무실 앞에서 항의하는 운천동 주민들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포클레인 속으로 뛰어들어
운천동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보름 뒤인 1986년 6월 12일은 송정동에서 사건이 터졌다. 전경 1000명이 동원돼 송정동 정사관 9가구 철거작업을 벌였다. 구급차와 포클레인 3대가 동원됐다. 포클레인 대바가지로 허름한 집 지붕을 누르면 폭삭 주저앉았다.
86세 노인이 "나두 같이 묻어라"면서 포클레인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인의 수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철거반원들은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노인은 찰과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됐다. 소수의 주민들이 똥바가지에 똥을 담아 철거반원과 청주시청 공무원에게 뿌렸다.
운천동·송정동 철거작업이 이뤄지기 전부터 청주도시산업선교회와 기독 청년들은 천막을 치고 노숙 투쟁을 벌였다. 한길녀 집과 송정동 9가구 철거 후에도 천막을 유지했다. 민중의 지팡이는 온데간데없고 '민중의 몽둥이'만 설치던 1980년대였다.

▲경찰 폭행에 입원한 송정동 이우 할머니.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