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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민주주의 실현할 때!"... 정적은 잠시, 박수가 터졌다

[정진동 평전] 정진동이 겪은 5.18

등록 2024.12.21 09:58수정 2024.12.2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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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공주대학교(옛 공주사대). (자료사진)
공주대학교(옛 공주사대). (자료사진)김종술

공주사대(현 공주대학교) 잔디밭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군데군데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그에 못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공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과 공주사대 학생과 직원들이었다.

흰 머리띠를 두른 학생이 잔디밭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주변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우루루 모여들었다. 머리띠 학생의 선창에 따라 "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물가 심어진 나무같이"라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부터 4.19혁명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선언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20년 전 4.19혁명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위한 추모시 낭독 순서가 되었다. 슬픈 눈매를 한 학생이 저음으로 시를 낭독했다.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다음 순서는 현 시국에 대한 자유 발언 시간. 머리를 짧게 깎은 ROTC(학군사관)가 앞으로 나섰다.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입니다. 영원한 독재를 하겠다는 발상입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때입니다."

발언을 마친 ROTC 젊은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은 마치 정신이 나간 듯했다. 혹시나 무엇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날씨는 화창했고, 잔디밭 주변에 있던 학생들의 아우성과 박수가 터졌다. 박정희가 쓰러지면서 1980년 '민주화의 봄'이 다가옴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1980년 4월 19일 금강에 이웃해 있는 공주사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까까머리와 정진동의 만남


"이번 4.19기념 집회에 초청 연사로 누가 좋을까요?" "정진동 목사님이 딱이여." "그분이 누군데요?" 이영복과 금강회 회원들은 이상헌의 입에 주목했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는 '노동자와 민중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목자다'라고 말하는 이상헌의 눈빛이 서클 회원 모두의 눈을 녹일 듯했다.

"형은 그분을 어떻게 아세요?" 이영복(공주사대 79학번)은 같은 학번이지만 삼수해서 들어온 이상헌에게 깎듯이 형 대우를 했다. 이상헌은 고등학교 다닐 때 정진동을 만났다. 교문 바로 옆에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을 때다. 특히 자신이 삼수를 할 때인 1978년도에는 후배들과 함께 청주산선 단식농성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유신 시절 고등학생들이 도시산업선교회 농성장을 방문한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자리에서 이상헌은 정진동 목사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노동자와 농민을 한 식구처럼 대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려는 순수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청년 이상헌은 '정진동처럼 살기'를 결심했다.

서울대학교를 낙방해 청주대학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때려치우고 삼수를 하던 그는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다. 민중을 위한 삶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학생운동의 무풍지대라 할 공주사대에 1979년도에 전략적(?)으로 입학했다.

입학해서 처음 한 것이 사회과학 학습동아리 '곰나루'를 그해 5월에 결성한 일. 이영복을 포함한 15~20명 회원들이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론> <페다고지>와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등을 학습했다. 학습이 끝나면 근처 가게에서 순대와 막걸리를 놓고 뒤풀이를 했다.

2학기 들어 실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1979년 10월 13일 공주사대 벽서사건이었다. 대학교 건물에 빨강 페인트로 "유신철폐 민주 회복"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썼다. 또한 본관 입구에 쓰여 있던 "유신 과업 완수하여 멸공 통일 이룩하자"라는 문구 중 '유신'이라는 글자에 페인트 칠을 했다.

이 일로 인해 이영복, 정선원, 권선길이 연행되었고 김익중, 이상헌이 추가로 연행됐다. 초범과 1학년이라는 이유로 9일 만에 모두 석방됐다. 경찰서에서는 풀려났지만 학교 측의 징계는 가혹했다. 이상헌은 제적됐고, 나머지 학생은 무기정학에 처해졌다.

이영복은 전라남도 광산군(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으로 내려왔다. 내려 온 지 이틀 만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저세상 사람이 됐다. '유신철폐'를 외쳤던 학생 이영복이 박정희의 사망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대학생들의 빚

즉 박정희의 죽음이 유신체제의 종식을 의미하고, 이것이 민주화의 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의 기대와는 달리, 대학교 1학년생 이영복은 막연한 슬픔에 젖었다. 전남도청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 가 조문을 했다.

정국의 급변에 따라 이상헌을 제외한 벽서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복학했다. 1980년 봄에는 서클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학원자율화추진 정책의 일환으로 학생회가 부활했다. 이상헌과 이영복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서클 이름을 '곰나루'에서 '금강회'로 변경해, 학교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대대적인 홍보로 회원을 확대했다. 1980년 4월 15일 40~50명이 모여 창립대회를 열었다. 창립대회 이후 첫 공식행사가 4.19혁명 20주년 기념식이었다. 추모시 낭독과 ROTC 학생의 자유 발언에 이어 정진동 목사가 학생들 앞에 섰다. 이날의 메인 순서였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 학생들을 향해 정진동이 입을 열었다.

"학생들은 빚쟁이다!" "..." 정진동의 선문답 같은 발언에 학생들은 멀뚱히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정진동은 대한민국에서 4년제 대학생들이 고등학교 졸업자의 3%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렇기에 4년제 대학생들은 사회로부터 특혜를 받은 것이고, 사회에 빚을 진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노동자·민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날 정진동의 강연은 공주대학교 잔디밭에 앉아 있던 약 100명의 학생들 가슴에 비수를 꽃은 격이 되었다. 특히 이영복에겐 그랬다.
그 시간부로 이영복은 '정진동 따라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까까머리 이상헌이 정진동의 학생 열성 신도 제1호라면, 이영복이 제2호가 된 것이다.

이영복 정진동 목사 초청강연회 실무를 맡았던 공주대학교 79학번 이영복
이영복정진동 목사 초청강연회 실무를 맡았던 공주대학교 79학번 이영복이영복

우암산

정진동이 청주의 합수부(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것은 공주대학교에서의 강연회가 있은 직후였다. 청주시 수동에 있던 육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됐다. 합수부 요원들의 구타와 고문은 없었지만 취조 기간 내내 욕설과 협박이 있었다.

"너 같은 빨갱이 새끼는 당장 죽여서 우암산에 파묻어도 그만이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당신이 나를 죽여서 우암산에 파묻는다고 정의가 영원히 죽는 것은 아니다."

합수부 요원의 협박에 정진동의 대찬 대꾸였다. 정진동은 자신이 끌려온 것을 여러 사람이 봤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기도 했다.

합수부 요원은 자신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음을 느꼈다. 정진동 목사에게 어떤 협박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사실 정진동의 발언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를 김대중과 연계시키던지, 당시 국내정세와 관련해 조작 사건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진동이 공주사대에서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진술했고, 자신은 학생들의 초청에 응했을 뿐이라고 했다. 결국 연행된 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정진동이 합수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을 때 청주시 사창동 중앙여고 옆에서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와 삽으로 콘크리트를 퍼 나르는 소리가 연일 이어졌다. 독일과 영국교회의 지원으로 청주도시산업교회 회관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공사 총감독을 해야 할 정진동이 일주일 만에 풀려나자 이번에는 조순형 전도사가 1980년 5월 말에 연행됐다. 그해 4월에 청주대학생 김용명(76학번)의 부탁에 선뜻 응한 게 문제였다.

1980년 4월 청주대학교 학자추(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부회장 김용명이 학교 안에 배포할 성명서의 타자와 등사를 부탁했다. 당시 시국 문제에 대한 성명서를 마음 편히 등사를 할 수 있는 곳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밖에 없었다.

청주산선 회관 신축 공사에 일꾼들 밥해주다가 연행된 조순형은 정진동이 얼마 전 구금됐던 국군보안사령부(합수부) 건물에 갇혔다. 조순형은 정진동의 닮은꼴이었다. 전혀 주눅들지 않고 사실대로 진술했다. 오히려 조사하는 이들이 놀랐다. 조순형은 연행된 지 며칠 만에 풀려 났다.

조순형에게 성명서 타자와 등사를 부탁했던 김용명은 청원군(현재 청주시) 오근장 근처 과수원에 몸을 숨겼다. 어떤 목사가 운영하는 과수원에 살던 조춘흥이 학생을 숨겨준 것이다. 조춘흥은 조순형 전도사의 아버지이다. 김용명은 후에 자수했다가 구속됐다.

등사기

1980년 7월 20일 주일예배에 참석한 이유근이 조순형에게 편지 한 통을 보여줬다. 이유근이 펼친 편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한 편의 시가 쓰여 있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 피눈물을 흘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 우리들의 아들은 /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의 시가 실린 전남매일신문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김준태의 시가 실린 전남매일신문전남매일신문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전문이었다. 편지를 펼쳐 든 조순형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김창규는 이 시를 등사해 배포하자고 했다. 이 시는 전남 영광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정병석을 통해 이유근이 받은 것이다. 조순형, 이유근, 김창규는 의기투합했다. 조순형이 타이핑을 치고 밤새 등사기를 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진동은 "나중에 문제 될 수 있으니까 조심해서 돌려"라고 했다. 마음이야 함께하고 싶지만 만약에 문제가 돼 두 명이 모두 구속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피해야 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회관을 건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밀고로 조순형, 이유근, 김창규가 7월 24일 연행됐다. 청주경찰서에서 조사받다가 대전교도소에 구속되었다. 그해 8월 23일 기소유예로 전원 석방됐다.

정진동은 공주사대 강연 건으로, 조순형과 이유근 김창규는 김준태의 시 인쇄 및 배포 건으로 후일 국가 유공자가 됐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국가유공자가 된 것은 2002년도였다.

정진동 추모 10주기인 2017년에 정진동 추모 배지가 제작됐다. 정진동 얼굴과 함께 '민중의 벗'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그런데 배지를 제작한 관계자나 받은 이 모두 배지의 존재를 잊은 지금도 배지를 꿋꿋이 달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공주사대 출신의 이영복이었다. '정진동처럼 살아가기'의 작은 실천이다.

광주민주유공자증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의 광주민주유공자증서
광주민주유공자증서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의 광주민주유공자증서청주도시산업선교회


#518 #공주대학교 #합동수사본부 #등사기 #김준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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