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유회홍세표 치료가 끝난 후의 야유회. 맨좌측이 홍세표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아내라고 속이다
정진동이 부리나케 사직동 집으로 뛰어가자, 집 앞에는 아내 조정숙과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다. 한 아줌마가 "아기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요"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정진동이 아줌마들을 앞세우고 문제(?)의 집을 찾았다.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아이고. 애기가 아기를 낳는다고 난리네!" 비명을 지르는 방 앞에서 모여 있는 아낙들의 이구동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산부는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여성이었다. 임신을 시킨 아기 아빠는 임신 초기에 종적을 감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산부의 아버지는 청주시청 청소부로 일하다가 사망했다. 임산부가 유산을 원했으나 그럴 돈조차 없었다. 밥 해먹을 돈이 없어 밀가루죽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러니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을 형편이 애초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출산을 앞두자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들었다. 난산(難産)이었다. 오전 9시에 아기는 나왔지만 중간에 탯줄이 끊겨 오후 6시까지 태반이 나오지 않았다. 산모는 정신이 혼미했고, 출산을 돕기 위해 온 아줌마들도 그런 상황을 처음 접해 당황했다.
정진동은 무조건 택시를 잡았다. 자칫하다가는 산모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산모는 그렇다 쳐도 택시 조수석에 탄 정진동과 뒷자리, 산모 친정엄마의 속은 새카맣게 탔다. 마냥 느리게 주행하는 것처럼 느낀 택시가 한 산부인과 앞에 정차했다. "산모가 위험합니다." "(입원)보증금은 있으세요?" 보호자의 애끓는 절규에 산부인과의 원무과 직원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냉담했다.
정진동은 욱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목사 신분증을 꺼냈다. "제가 목사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으니 입원시켜 주시오." 하지만 병원에서는 입원 수속을 밟지 않았다. '아기와 산모가 죽어가고 있는데, 입원비가 없다고 치료를 안 하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항의했지만, 허공에 대고 떠드는 소리 격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은 온데간데없던 시대였다.
더이상 그 산부인과에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충북도립병원(현재 청주의료원)으로 향했다. 나라에서 서민들을 위해 운영하는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반응은 똑같았다. 병원비가 없으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국립병원이 위급한 환자를 두고 돈으로 흥정할 수 있어요!" "환자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정진동의 거센 비판에 도립병원 원무과장의 대꾸였다.
"남편이오"라며 목사 신분을 밝혔다. 급하게 오느라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하며, 빨리 치료해 달라고 했다. 그제서야 입원 수속을 밟고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이 끝난 후 정진동은 원장을 만나 사실대로 얘기했다. "사실은 환자의 남편이 아닙니다" "예?" 병원장은 기겁했다. 정진동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차저차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정진동이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긁어서 3000 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정진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장은 "그냥 돌아가십시오"라고 했다. 당시 병원비는 25만 원이었다. 정진동이 내놓은 돈은 전체 병원비의 1/80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정진동이 어린 임산부의 남편이라고 속여 귀한 생명을 구한 때는 1973년도였다.
냉방에서 3일 동안
급하게 연락을 받은 정진동이 버스를 타고 청주 남궁외과에 도착했다. 정진동을 발견한 환자의 남편이 두 손으로 수화(手話)를 했다. "목사님. 아내가 죽어가요.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걱정 마세요"라며 안심시킨 정진동은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진천 덕산교회 교인인 환자는 넋을 잃은 상태였다. 여러 병원에 다니며 검사를 받느라 파김치가 된 것이다. 병원에 갈 때마다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천편일률적인 답이었다.
무리해서 서울 메디컬센터에서 진찰을 했는데 수백만 원의 병원비가 소요된다고 했다. 단돈 만 원도 없는 처지에서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온 것이 당시 청주에서 사립병원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남궁외과였다.
환자가 반죽음상태였지만 냉방에서 사흘동안이나 대기를 했다. 입원 보증금이나 보증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환자의 남편은 일자무식에 언어 장애인이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서 근근이 살다가 착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자식 6남매를 둔 이들이 가진 전 재산은 오막살이 한 채에 불과했다(정진동, <저 평등의 땅에>, 1992).
정진동은 병원 관계자에게 항의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하는 겁니까?" '어떤 관계냐'라는 물음에 우리 교회 교인이라고 했다. "나는 이 교인을 돌볼 책무가 있는 목자의 사명을 가졌으니,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를 믿고 환자를 치료해 주세요." 그 시간부로 정진동은 환자의 보증인이 됐다. 입원 보증금 없이 입원 절차를 밟고 수술에 들어갔다.
정진동은 수술실에 입회했다. 전신마취를 한 환자의 복부가 열렸다. 처음 목격하는 수술 장면에 정진동은 손에 땀을 쥐었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주먹만 한 살덩어리를 잘라냈다. 대수술이 끝났다. 암일 것 같아 한 걱정했던 의사들이 맹장이 상해서 생긴 병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이었다.
민중의 SOS
수술은 잘 마무리됐지만 병원비가 문제였다. 정진동은 수술을 마치자마자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행 버스를 탔다. 수요 저녁 예배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진동은 교인들에게 오막살이집 아내의 수술 이야기를 했다. 그날 1만5000원의 헌금이 모였다. 정진동은 남궁외과로 가서 환자의 남편과 함께 병원장 남궁박사를 만났다. "이분이 환자의 남편입니다."
소개받은 이가 두 손짓으로 병원장에게 감사하다는 수화를 했다. 정진동이 이를 통역했다. 언어장애인인 환자의 남편이 봉투를 꺼내, 남궁박사에게 공손히 전했다. "저희가 가진 것의 전부입니다. 너무나 적은 금액이지만 받아 주십시오"라고 했다.
언어장애인의 몸짓과 이를 통역한 정진동의 설명을 들은 남궁박사는 한동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돈은 거두어주세요. 수술비와 치료비는 모두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의 이야기를 듣는 정진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병원장의 환한 웃음에 자신이 잘 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가난한 이, 핍박받는 이, 억울한 이의 SOS(구조요청)에 언제나 달려가는 정진동의 진가(眞價)는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정진동의 모습과 말에 공감해 무료치료를 해 준 남궁박사도 '청주의 슈바이처'나 다름없었다.
선(善)의 전파는 개울물이 강물로 흐르듯 하는 것일까? 선한 마음이 모여 하나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정진동이 진천 덕산교회에서 시무할 때인 196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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