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놈아"로 시작되는 공군장교(대위)의 협박편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국과 국민을 위해 땀과 피를 쏟는 군인으로서 너희 놈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의 좌경 의식화에 대해 개탄과 분함을 참지 못해 이 글을 쓰노라'로 시작되는 편지는 청주 북일면(현 내수읍)에 소재한 공군부대에서 온 편지였다.
대위 윤아무개의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로 도배됐다.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두둔하는 놈들(정진동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을 처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편지는 '네놈 같은 좌경의식을 부르짖는 빨갱이들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돼야 함을 주징한다'로 끝맺었다.
정진동이 계엄법 위반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석방된 지 2년여 됐을 때 정국을 강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문부식 등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1980년 5월 발생한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는데 미국이 이를 묵인한 것에 비판의 화살을 쏜 것이다. 1945년 이래 '반미운동의 무풍지대'로 알려진 대한민국의 공식이 깨진 날이다.
정권은 문부식과 김은숙을 포함한 사건 주동자 16명을 구속했다. 또한 사건 주동자들을 숨겨줬다는 명목(범인은닉죄)으로 카톨릭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가 구속됐다. 최 신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도 추가됐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성격이상자들의 난동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신·구교 세력과 재야는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이 발발하자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 세력, 특히 산업선교 단체를 친북·반미세력으로 규정하고 붉은칠 하기에 전력투구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재향군인 등 보수 인사들을 동원해 협박 전화와 협박 편지를 하게 했다.
청주에서는 공군부대에서 조직적으로 정진동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협박 편지에 그치지 않고 정진동을 불법 납치했다.
'앞으로 까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협박을 했다. 물론 그런 회유와 협박에 정진동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공군부대에서 정진동을 1980년대 중반까지 일상적으로 감시했다.
예수교 장로회 탈퇴

▲예수교장회 충북노회 단체사진. 1979년도. 정진동은 이 모임을 마지막으로 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를 탈퇴했다.
<충북노회 80년사>
"충북노회와 잘 협의하세요." 근심이 가득한 정진동에게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가 조언했다. 1973년 청주시 사직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래 정진동은 곁방살이의 서러움을 혹독하게 겪었다. 사직동에서 서문동으로, 사창동, 복대동, 금천동으로 거의 해마다 이삿짐을 싸야 했다. 자기들의 독자적인 도시산업선교회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조지송의 추천으로 독일 EZE 재단과 영국 교회에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관 건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후원금이 개인 교회가 아닌 교단을 통해 지원되는 것이 문제였다. 예수교 장로회 충북노회와 원만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진동은 단순히 회관 건립 문제뿐만 아니라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문제로 예수교 장로회 충북노회를 탈퇴했다. 이어서 1979년 10월 8일 기독교 장로회 충북노회에 가입했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사창동 중앙여고 앞으로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은 1980년 12월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공유하기
신부 없는 '위장 결혼식'... 날아온 '계엄법 위반 공소장'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