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주동 골목길에서 펼쳐지는 추억돋는 옛날 놀이와 체험들
이현숙
나의 골목이야기는 지금은 20대 성인이 된 아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갓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키도 작고, 심성이 여린 데다 힘도 약해서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는 어느 날 아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은 넓고 편한 도로가 아닌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탐색하며 매일 등하교를 했던 것이다.
대문도 없이 현관문을 열면 바로 주방이나 방으로 들어서게 되는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골목길이었다. 마치 미로처럼 여러 갈래의 좁은 길들이 펼쳐져 있는 그 골목길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던 아들. 어느 날 나도 아들이 누비고 다닌 그 골목길을 지나 보았다.
하얗게 타고 버려진 연탄재, 길고양이들, 시멘트를 뚫고 핀 들꽃, 알록달록 널린 빨래와 꽃무늬 커튼, 앙증맞은 쓰레기통과 낡은 플라스틱 의자들이 골목 사이사이에 그림엽서처럼 꽂혀 있었다. 또래에게 놀림 받고 친구에게 무시당하며 쓸쓸하고 힘들었을 아들에게 골목길의 정겹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후에도 아들이 자기만의 비밀처럼 간직하고 누렸을 골목길을 끝내 모른 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장 빠른 지름길로 다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신나게 골목길을 섭렵하는 아들을 그려보는 나의 기쁨을 위해.

▲ 명주동 골목의 가을을 살찌우고 있는 감나무
이현숙
우연히 날아와 정착한 홀씨처럼 강릉 살이를 시작한 내게 명주동 골목 풍경은 낯설지만 낯익은 어린 시절을 그렇게 불러들였다. 골목마다 놓인 소박한 나무의자에 앉아 감나무마다 매달린 설익은 어린 감을 쳐다본다.
방앗간을 개조한 '봉봉방앗간'카페 2층 창밖에서 보았던 감나무에도 감색이 짙어지며 익어가는 감을 보았다. 오래된 집일수록 감나무가 굵고, 크고, 무성했다. 다가올 추석에 잘 익은 감을 따서 한 동네서 정붙이고 살아온 이웃들과 맛나게 나누어 먹을 상상을 하니 좋았다.
담쟁이가 끌어안은 은행나무 보며 떠오른 것들

▲ 강릉 대도호부 관아 동헌에서 임영관 삼문쪽으로 통하는 문
이현숙
화려한 단청보다 더 위엄 있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도호부 관아의 임영관 3문은 볼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진다. 그렇지만 그 앞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도로의 부조화는 몹시 거슬린다.
잡초로 뒤덮이고, 녹슬고 망가진 그네와 시소가 방치된 화교소학교. 운동장의 절반이 파헤쳐져 공사 중인 해람중학교의 모습이 겹쳐지며 '변해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방과 이용원, 시장통닭 같은 상호와 가게들이 옛 중심지였던 명주동 일대에서 사라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 있는 작은 도서관. 지역관련 고서와 자료가 많다.
이현숙
칠사당 앞길에서 명주예술마당 골목 입구로 가는 도로변은 은행나무로 촘촘히 이어져 있다. 칠사당 마당의 유서 깊은 은행나무를 호위하듯 줄지어 선 은행나무마다 절반쯤은 담쟁이 넝쿨 잎이 뒤덮고 있다.
담쟁이 잎은 왜 은행나무를 에워싸듯 감싸 오를까? 수천, 수만의 군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듯 은행나무를 뒤덮어 정복하려는 담쟁이의 의지일까?

▲ 강릉 대도호부 관아의 칠사당 은행나무. 수령이 6백년이 넘었다.
이현숙
담쟁이가 끌어안은 은행나무를 보며 은행나무처럼 새파랗게 푸른 청춘을 지나 샛노란 단풍으로 빛나던 시절이 떠올랐다. 서울토박이로 반백년을 살았고, 우연을 가장한 인연처럼 심신을 의지하게 된 강릉. 이곳에서 만나고 부대끼는 새로운 삶이 담쟁이 넝쿨처럼 내게 새로운 뿌리와 가지와 잎을 내리는 것 같다.
내가 있는 곳이 늘 세상의, 시대의 중심이 되는 거라고 주문처럼 왼다. 아직도 강릉의 일상이 때론 벅찬 일탈처럼 느껴지곤 하지만 담쟁이 넝쿨도 되고, 은행나무도 되어 온전한 삶과 나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쉴 수 있는 나무의자와 향 깊은 커피, 작은 도서관의 나들이가 가능한 이곳에서 오래도록 숨을 고른 뒤 다시 한 발자국씩 내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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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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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담쟁이, 가을 풍경 보며 떠오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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