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오국사탑비 보호각 안에 들어 서 있는 보물 제9호 현오국사 탑비
하주성
마모된 비문,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어
현오국사 종린(1127~1179)의 출가 이전의 성은 왕(王)씨였다. 이름은 중지로 기개와 도량이 뛰어났다고 한다. 13세 때 출가해 인종 19년인 1141년 불일사에서 계를 받고, 의종 즉위년인 1146년 이후 수좌(국사의 높임말)가 되어 귀신사와 국태사, 부석사 등의 주지를 맡았다.
그 후 승통이 되어 법문을 이끌었으며, 명종 원년인 1171년에 왕에게 가사를 하사 받았다. 그리고 명종 8년, 53세의 나이로 입적에 들었다. 명종은 현오국사가 입적하자 국사로 추증하고 현오라는 시호를 내렸다.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조차 힘든 비문은 아래쪽 일부가 탈락 돼 있었다.
현오국사 탑비의 비문은 이지명이 지었고, 글씨는 유공권이 썼다. 비는 높이 1.88m에 너비 0.97m인 점판암을 사용했으며, 받침돌은 화강암이다. 비의 상부 부분은 모서리를 깎아서 마름모꼴로 했으며, 사각형의 대석도 간단히 하여 12세기 말 이후 고려 석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비문 비문의 위는 양편을 깎아내 마름모꼴로 구성했다
하주성
▲비문 현오국사 탑비의 전면(좌)과 후면(우)
하주성
비를 찬찬히 돌아본 후 앞산을 내다봤다. 높지 않은 산봉우리가 걸쳐있고, 그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곳이 절터로 적합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에 현오국사의 탑비가 있는 것으로 봐 부도 등도 있었을 텐데, 부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봄이 오는 길목에 찾아간 현오국사 탑비. 발굴 조사가 다 끝나면 또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발굴지 지도를 보니 2차 조사 지역만 해도 1780제곱미터라고 한다. 첩첩이 쌓인 축대가 여기저기 널린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모두 서봉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봉사지, 왜 진즉 찾아오지 못했을까? 문화재 하나를 만나는 길이 꽤 길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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