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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고난의 행군 (1995년~1998년) 당시를 새겨보자.

탈북한 주민들이 국경에 넘쳐나고 어린 꽃제비가 앙상한 걸음으로 식량을 구걸하는 장면이 남한 TV에 방영되었을 때 북한 주민 150만이 죽었네, 200만이 죽었네 죽음을 숫자로 매기면서까지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앞다투어 희화화 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자국의 백성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고 간 북한 정권 수뇌부의 부도덕하고 게걸스러운 삶을 비난하기에 더 열을 쏟았었다.

"국민들이 저렇게 죽어나가는데 삼대 세습에 환락에 가까운 비밀스러운 사생활까지 누린다는 독재자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남한 사회 일반의 상식이었던 점을 부인할 방법은 없다. 왜 북한의 경제상황이 전쟁보다 더한 참혹한 상황이 되었는지, 국제 사회는 왜 그런 상황을 방관하고 탐닉하며 북한 정권의 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일말의 분석조차 자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치도곤을 당해야 하는 때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대북제재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국제사회(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로부터 한 번도 제재를 안 받아 본 적이 없다. 미국은 이미 1949년 수출통제법(Export Control Act of)을 적용하고 대북 금수조치를 시작으로 적성국 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국제금융기관법(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 Act), 북한위협감소법 (North Korea Threat Reduction Act), 국제종교자유법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Act), 인신매매피해자보호법 (Trafficking Victims Protection Act) 등 셀 수 없을 만큼의 제재 사항과 각종 행정명령을 작동했고 20여 차례가 넘는 유엔 안보리의 결의와 유럽연합의 북한 제재 결의, 일본정부의 북한을 목적지로 하는 수출전면금지 조치 등은 한국전쟁으로 초토화 된 북한에 서방의 물자는 바늘 한 개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1990년대 이후 소련이 무너졌고 중국은 실리를 챙겼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1994.7. 8) 이듬해부터 그 이듬해까지 엄청난 홍수가 북한 전역을 휩쓸었다. 그 너머 이듬해에는 견디기 힘든 가뭄이 들었다. 기름이 고갈되니 교통이 마비되고 전력생산이 안 되면서 자연재해로 식량까지 고갈됐다. 어림잡아 30여만 명의 아사자가 생겼는데 그중에 대부분은 질병에 약한 노약자가 아니면 당성이 강했던 노동당원이었다. 그 아수라의 현장을 전해 들으며 안타까워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계의 언론은 북의 현실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국민들을 굶겨 죽인다고 질책하는데 바빴다.

세 차례의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논하는 현재에도 국제사회의 제재는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고 있다. 미운 놈도 떡 하나 더 준다고 했지만 누구 하나 떡을 던져주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갔는데도 미운 놈 취급을 받는 것조차도 국제사회에서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상반(相半),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채워준다는 민초들의 삶의 방식을 그들에게는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못살도록 조건을 만들어 놓고 못산다고 타박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익숙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넸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 
 
부두에 정박한 북한 어선 (서울=연합뉴스) 지난 15일 북한 선원 4명이 탄 어선이 연안에서 조업 중인 어민의 신고로 발견됐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와 달리 삼척항에 정박했다고 KBS가 18일 보도했다. 사진은 북한 어선이 삼척항 내에 정박한 뒤 우리 주민과 대화하는 모습. 2019.6.18 [KBS 제공]
▲ 부두에 정박한 북한 어선 (서울=연합뉴스) 지난 15일 북한 선원 4명이 탄 어선이 연안에서 조업 중인 어민의 신고로 발견됐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와 달리 삼척항에 정박했다고 KBS가 18일 보도했다. 사진은 북한 어선이 삼척항 내에 정박한 뒤 우리 주민과 대화하는 모습. 2019.6.18 [KBS 제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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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삼척항 방파제에 목선이 하나 들어왔다. 이들은 모래온천 요법으로 북한에서도 이름난 함경북도 경성의 집산포구에서 지난 6월 9일 자정에 배를 띄었다. 오징어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으나 정작 오징어잡이는 두 차례의 그물질에 그쳤다. 잡은 오징어는 어장을 지나가는 상선에 넘기고 배는 동해상의 NLL을 넘어 남하했다.

울릉도를 지나 뭍에 도착하기까지 이 배는 꼬박 엿새 하고도 6시간 20분을 동해에서 배회했다. 고작 길이 10m, 중국산 28마력짜리 엔진을 장착한 소형 목선에 목숨 줄을 맡긴 네 명의 선원은 칠흑 같은 심해의 어둠과 싸우며 추레한 모습으로 삼척항 방파제에 도착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지난밤엔 별도 하나 보이지 않던데 전깃불 하나 없이 그 깜깜한 밤을 어찌 견디셨소. 파도는 이길 만하던가요? 출렁대는 파도 위에서 식사는 제대로 하셨나요? 애쓰고 애쓰셨소. 뜨끈한 곰치국에 밥 말아 드시고 한잠 푹 주무시오. 북의 가족들은 얼마나 걱정이 많겠소. 어서 돌아가 살아 돌아왔다고 다독여 주시오."

이유야 어찌됐건 생사를 건 항해 후에 뭍으로 살아 돌아온 가난한 어부를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그 항구에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에서 내려온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목선과 비슷한 크기의 범고래나 큰부리고래가 같은 시각 삼척항에 들어왔다면 그야말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살아서 왔다면 생명, 생태. 자연과 평화라는 이름을 단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고래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해 모여들었을 것이고 죽어서 왔다면 비싼 고깃값을 탐내는 상인들이 내심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6. 15공동선언 19주년이 되는 6월 15일 새벽 목선이 들어오는 시각에 경계를 섰던 병사가 지난 7월 8일 스스로 한강다리에서 투신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 6. 15공동선언 19주년이 되는 날 차라리 길 잃은 고래가 되지 못한 북한 목선의 입항으로 인해 육군 23사단장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취임 1년이 채 안된 국방부 장관은 야당의 해임요구를 받고 있으며 삼척 시민들은 관광객들 발길이 뚝 끊겼다며 생계 걱정을 한다.

북한 목선의 궁핍한 항해를 따뜻한 말 한마디로 맞이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 여겨지지만 애초 이 반도의 남쪽은 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능력이 없는 사회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금의 한반도 상황이 북한의 비핵화 문제인지 유엔의 대북제재 문제인지는 가늠해볼 만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의 뇌 속에 체화되어 있는 이른바 북에 대한 사상(思想)의 틀부터 재고(再考)해야 한다. 그때, 북한의 배고파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같은 한반도에 살며 밥 세끼 꼬박꼬박 먹고 사는 내 모습을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었다고, 평범하게 사는 일을 알기도 전에 자신의 죽음조차 평범한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그 아이들이 남쪽 땅 어디에선 매일 음식이 남아 버린다더라 소문을 듣고 원망할까 봐 두렵기도 했었다고 늦었지만 고백해야 한다.

고작 10m짜리 목선에 생의 기대를 걸고 파도를 헤쳐 온 어부에게 간첩 혐의를 묻고 무기가 있는지 혹은 특수훈련을 받은 흔적이 있는지를 먼저 찾았던 우리가 미안했다고,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니 살아서 내 땅에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확인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우선이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분단 후 66년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해서는 안 되었던 우리 머릿속의 대북제재를 먼저 해제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지상은 가수 겸 작곡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대북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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