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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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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커 부시(아들 부시)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미국 네오콘(신보수)을 대변하면서 공격적인 세계 전략을 이끌었다. 그랬던 조지 부시가 화가의 모습으로 나타나,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하고 노무현 초상화까지 전달할 예정이다.

부시의 한국 방문 목적은 방산 기업인 풍산그룹과의 일정을 소화하는 데 있다. 풍산그룹과의 인연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에 '노무현 초상화를 전달하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했고, 이것이 계기가 돼 추모식에까지 참석하게 됐단다. 

2009년 1월 63세 나이로 백악관을 떠난 부시는 전업 화가처럼 생활해왔다. 풍경화나 반려동물 등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벌이는 그는 대통령직 수행 경험을 살려 각국 정치인 초상화를 그리는 데도 시간을 투자했다. 2014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의 초상화를 소재로 텍사스주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2017년에는 퇴역 군인 100여 명의 초상화를 소재로 <용기의 초상화>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조지 부시가 많은 초상화들을 그리긴 했지만, 부시가 노무현 그림을 들고 봉하마을까지 찾아가는 모습은 두 사람 관계를 감안할 때 상당히 낯선 '그림'이다. 부시가 그런 모습을 연출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색적인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과 부시, 부시와 노무현

노무현과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46년에 태어났다. 부시가 7월 6일 태어나고, 노무현이 9월 1일 출생했다. 대통령이 된 것도 부시가 약간 빠르다. 부시는 2001년 1월 취임해 2009년 1월 퇴임했고, 노무현은 2003년 2월 취임해 2008년 2월 퇴임했다.

두 사람의 재임 기간은 6자회담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6자회담은 1993년 제1차 북미 핵위기 9년 만에 발생한 2002년 제2차 핵위기를 수습할 목적으로 시작됐다. 당사자인 북한·미국과 더불어 한국·중국·러시아·일본의 참여로 베이징에서 개최된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일 제1차 회담으로 첫 선을 보이고 2008년 12월 수석대표회담 합의 실패를 계기로 중단됐다.

나머지 5개국의 주목을 거의 끌지 못한 북한의 공식 언급이 있다. 2009년 7월 15일 대외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 뒤로도 한미일 3국이 6자회담 재개를 시도하고 올해 4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까지 6자회담 재가동을 제안했지만, 이 회담은 노무현 퇴임 10개월 뒤 역사 속으로 사실상 퇴장했다. 따라서 6자회담은 노무현·부시 때의 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노무현과 부시는 '애증'의 관계를 형성했다. 동맹국답게 보조를 맞추는가 하면, 세계가 깜짝 놀랄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미 두 정상의 '애증관계'

한국과 미국 대통령이 애증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전까지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전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재임 1998~2003) 때도 불협화음이 있기는 했지만, 노무현 이전만 해도 한미 대통령 사이에는 사실상 수직 관계가 상당히 명료했다. 그래서 애증 관계 같은 게 생겨나기 힘들었다. 물론 노무현 때도 수직 관계는 유지됐지만, 이때는 애증 관계가 생길 만큼 작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2002년 한국 대선운동 기간에, 미국 행정부는 노무현 후보가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점을 우려했다. 변호사를 하고 국회의원을 하기도 했지만, 노무현은 가난을 극복하느라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미국에 갈 일이 있다면 갔겠지만, 딱히 용무도 없는데 일부러 찾아가기도 힘들었을 듯하다. 그래서 못 갔을 텐데도, 미국은 혹시 반미감정 때문이 아닌가 염려했다.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선거캠프 안에서는 미국 방문 문제가 쟁점이었다.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미국에 가라고 했다. 명을 내리기만 하면 미국 조야의 지도자들과 월가의 큰손들을 만나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미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비자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슨 결격 사유나 되는 것처럼 걱정했다."
 
노무현 캠프 안에서조차 이런 심각한 우려가 나왔으니, 미국이 노무현의 미국 무(無)방문을 의심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노무현이 국군통수권을 쥐는 순간부터 반미 성향을 표출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던 모양이다. 노무현보다 먼저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도 그런 우려의 소리를 당연히 접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반미 투사'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우려가 전혀 근거 없지 않았다는 점이 6자회담 국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국·중국·러시아·일본과의 공조로 북한을 압박한다는 미국의 전략에 노무현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을 내세워 대북 압박전략을 구사하는 네오콘에 맞서 노무현이 '평화적·외교적 북핵 해결' 노선을 천명했던 것이다. 
  
정상회담 당시 '부시 독트린' 접게 한 노무현
 
 2003년 5월 14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한미 정상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회견 도중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2003년 5월 14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한미 정상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회견 도중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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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본색'은 취임 3개월도 안 돼 드러냈다. 그는 2003년 5월 14일(현지시각) 부시와의 정상회담 뒤 발표한 공동성명에 '외교적·평화적 북핵 해결 원칙'이 들어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부시가 원했던 '대북 압박 및 군사적 옵션' 카드를 공동성명에서 뺐던 것이다. 노무현이 '그 누구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일 수 없다'는 입장을 적극 천명한 결과였다.

부시는 '북한 같은 악의 축과 불량국가에 대해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부시 독트린을 2002년부터 천명한 인물이었다. 그보다 1년 전인 2001년 3월엔, 워싱턴D.C.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가리켜 '디스 맨'(this man)이라고 지칭했던 인물이다. 미사일 방어체제(MD) 구축을 지지해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김대중이 거절한 데 따른 '앙갚음'이었다.

공개 석상에서 한국 대통령을 '이 사람'이라고 부르며 외교적 치욕을 줬던 부시. 그랬던 그가 불과 2년 뒤 노무현 앞에서는 별다른 대꾸도 못한 채, 적어도 대북관계에서만큼은 자신의 독트린을 접어야 했다. 그날 부시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다"라고 언급한 뒤 회담장을 떠났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라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인격적으로 훌륭하지만, 부시 입장에서는 노무현 쪽을 상대하기가 조금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부시 잡는 노무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노무현의 외교적 성과는, 미국 언론이 '김정일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지칭하는 재일동포 군사평론가 김명철(전 <조선신보> 기자)의 감탄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북한 지도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한국 대통령들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던 그가 2003년 7월호 월간 <말>에 기고한 '북핵위기와 노무현 외교/입장 2- 노무현이 부시·고이즈미 동맹 이겼다'라는 글에서 노무현을 높이 평가하는 일이 있었다.
 
"악의 축에 대해서는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고 떠들어대던 부시가 이른바 부시 독트린의 적용을 주저하며 '북핵 문제는 외교적·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노무현 정권이 한국도 공멸하게 될 '북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옵션'을 전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무현이 대북 압박정책에 전면 지지를 표명하며 미국과 일본을 오갔다면, 한반도가 전장으로 전락하고 한·일 양국도 전 국토가 불바다로 변해 소멸할 가능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것이다."
 
노무현이 한국의 입장을 과감히 개진한 것은 한반도를 전쟁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땅을 미국의 전쟁터로 만들지 않겠다는 그의 간절한 소신 앞에서, 부시는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독트린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이 만든 '사건' 
 
 2004년 11월 12일(현지시각)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및 남미 3개국 방문을 위해 출국한 노무현 대통령이 첫 기착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 미국의 민간 외교정책단체인 국제문제협의회(WAC)가 주최하는 오찬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이후 미국과 양국관계에 대한 첫 번째 메시지 성격의 연설을 하고 있다.
 2004년 11월 12일(현지시각)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및 남미 3개국 방문을 위해 출국한 노무현 대통령이 첫 기착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 미국의 민간 외교정책단체인 국제문제협의회(WAC)가 주최하는 오찬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이후 미국과 양국관계에 대한 첫 번째 메시지 성격의 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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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 국내에서 개봉된 아담 맥케이 감독의 다큐 영화 <바이스>에서 묘사된 것처럼, 부시 행정부의 외교전략은 실제로는 딕 체니 부통령의 기획과 지휘 하에 전개됐다. 부시는 외교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이 점은 박성관 경남대 교수의 논문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과 외교정책 참모 체계의 성격: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에서도 나타난다. 박성관 교수는 "(부시는) 외교정책 경험이 부족한 개인적 배경으로 인해 편의상 외교정책 결정 과정을 참모들에게 상당히 위임하는 스타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외교 문외한인 부시가 노무현과 회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시 참모진은 적지 않게 긴장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노무현한테 더 이상 밀리지 말자'는 다짐 같은 것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부시는 노무현에게 다시 한 번 밀렸다. 이듬해인 2004년 11월 13일 로스앤젤레스(LA)에서였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하러 아메리카대륙을 여행하다가 LA에 들른 노무현은 미국 국제문제협의회 오찬 연설에서 "북핵 해법은 미국의 대북 위협 포기"라는 의외의 발언을 내놨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대북 압박을 포기하는 게 북핵 해법의 요체라는 이 발언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발언이 한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욱 더 그랬다. 노무현의 발언은, 7일 전 대선에서 승리해 재선 확정의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던 부시한테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부터 7일 뒤 칠레 산티아고에서는 더 큰 일이 있었다. 한미정상회담 당시 노무현은 LA 발언의 여세를 몰아 부시를 또다시 압박했다. 그래서 얻어낸 성과가 '한국이 6자회담을 주도한다'는 점에 대한 부시의 양해였다.

6자회담은 미국의 주도 하에 중국이 중재하는 가운데서 진행됐다. 그런데 노무현은 중재권도 아닌 주도권을 획득했다. 부시한테서 주도권을 가져온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6자회담이란 배가 산으로 올라갔다고 탄식할 만한 일이었다.

2009년에 김영남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라고 선언했지만, 2004년에 이미 6자회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미국의 대북 압박을 위한 6자회담이란 배가 노무현의 구상대로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전략이 이로 인해 차질을 빚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극단적인 충돌이 생기지 않고 제2차 핵위기와 6자회담이 유야무야로 끝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노무현의 '6자회담 주도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이 6자회담을 주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일시적으로나마 한국이 6자회담 주도권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한미관계로 보나 한국 외교 전반으로 보나 상당히 특별한 사건이었다.

부시의 '좀 유치한' 반격

그러나 부시가 항상 밀리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부시의 뒤에는 세계제국 미국이 버티고 있었다. 노무현의 개인적 역량만으로 노무현-부시 관계가 정립될 수는 없었다. 결국 부시는 6자회담 주도권을 되찾아갔다.

게다가 부시는 노무현에게 무안을 주기까지 했다.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직전인 2007년 9월, 시드니에서 노무현이 북미 종전선언 문제를 거론하자 부시는 "더 이상 어떻게 말햐느냐?"라며 자리를 떠났다.

1945년에 세계 최강이 된 뒤로 미국은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동시에 마무리하는 외교적 관행을 축적해왔다. 그런데 이 관행을 배려해주지 않고 남북한이 똑같이 '평화협정 이전에 종전선언부터 하자'고 했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는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시드니 회담 직후이긴 하지만, 2007년 10월 25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서울시립대 특강 뒤의 기자회견에서 "평화협정이 곧 종전선언을 의미한다"라고 발언한 일이 있다. 이런 데서도 나타나듯이 미국은 '우리는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강조했다. 그런데도 적대국인 북한뿐 아니라 동맹국인 한국의 대통령마저 미국의 관행을 배려해주지 않으니, 부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만도 했을 법하다.

세계 최강 미국의 관행을 배려해주지 않는 노무현에 대해, 부시는 외교적 무례를 범하는 방법으로 무안을 줬다. 자신을 압박하는 노무현에 대해, 국력을 배경으로 하는 '좀 유치한' 외교적 결례로 응수했던 것이다.

부시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핵문제에서 노무현한테 밀린 부시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서는 노무현을 곤란한 입장에 몰아넣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들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이라크 파병과 FTA 체결에 동의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특히 파병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의 대북 압박을 약화시킨다는 명분 하에 미국의 요구를 들어줬다. 문재인 대통령의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 시종일관 '무력에 의한 대북문제 해결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천명했다. 북핵문제는 철저하게 대화를 통해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대통령 소신은 확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끌어가기 위해선 미국 정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자면 우리도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처럼 북핵 문제에서는 부시가 밀렸지만, 이라크 문제나 FTA 문제에서는 노무현이 밀리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사안들과 관련해 노무현은 국민 여론은 물론이고 자기 소신마저 접고 부시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조지 부시와 노무현의 관계는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를 했던 관계다. 애증이 중첩된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속에서 정이 생겼는지 부시는 퇴임 후에 쓴 자서전 <결정의 순간>에서 노무현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2009년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접하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라고 기술했다고 한다.

그런 애증관계의 당사자인 조지 부시가 노무현 초상화를 들고 23일 봉하마을에 나타난다. 그의 눈에 비친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구체적 모습이 그가 건넬 초상화에서 좀더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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