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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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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은 1990년부터 차츰 건강에 이상증후가 나타났다. 하지만 벌여놓은 일이 많았고 찾는 사람도 줄지 않아서 일상을 멈출 순 없었다.

이듬해 6월 14일 위암 진단을 받았다. 생과 사에 크게 괘념치 않는 성격이어서 원주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강연과 업무, 만남을 계속하였다. 

1993년 3월부터 병세가 다소 호전되는듯하자 이현주 목사와 '노자 풀이'를 시작하고 강연도 다녔다. 9월부터 병세가 악화되면서 원주기독교병원에 재입원했으나 차도가 없어 10월 13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11월 13일에는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로부터 투옥 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게 되었다. 

병세가 다시 호전되면서 1994년 2월 14일 세브란스병원을 떠나 원주기독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환중에서도 몇해 전에 선종하신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구성을 지도하는 등 열정을 다해 평생의 동지이던 지 주교의 추모사업을 독려하였다. 추모사업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다시 병세가 악화되었다.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 무위당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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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은 1994년 5월 22일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산동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67세였다. 5일장으로 치른 장례식은 원주시 봉산동 천주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조문객 3.000여 명이 참석할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생전에 무위당과 인연을 맺은 민주인사 다수와 한살림운동 관계자들을 비롯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하였다. 흔한 훈장 하나 없는 장례식이었으나 여느 명사의 장례식 못지않는, 그러나 경건한 장례식이었다. 

아침의 화려한 일출보다 황혼의 일몰이 더 아름다울 수 있고, 더욱 장엄하다는 것을 무위당의 죽음과 장례식이 보여주었다. 여러 사람의 추도문 중에 각별한 사이였던 리영희 교수의 「민주와 통일의 꽃 끝내 못 보시고」라는 추도문을 소개한다.
 
 논길 옆 무위상 장일순 선생 묘쇼
 논길 옆 무위상 장일순 선생 묘소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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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교수의 추도문

삼가 일속자 장일순 선생님의 영전에 바치나이다.

선생님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군부독재와 싸워온 모든 동지ㆍ후학ㆍ후배들의 뜨거운 기도의 효험도 없이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야만적인 군부통치를 물리치고 이제 막 민주주의의 막이 열리는 순간에 선생님은 그토록 갈구하신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슬픕니다. 원통합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국가와 사회가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고결하셨습니다. 병든 이 시대가 반기기에는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올곧은 삶을 일관하셨습니다. 

사악하고 추악한 것들은 목에 낀 가시처럼 선생님을 마다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선생님이 계신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929번지는 인권과 양심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의에 몸 바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하나의 작은 성지였습니다. 진정 그러했습니다.
 
 
 장일순 유시
 장일순 유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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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적막하여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3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원주의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는 이에게는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공과 영예를 후배들에게 돌리시는 민중적 선각자이시고 지도자이셨습니다. 원주의 그 잡초가 무성한 집은 군부독재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지친 동지들이 찾아가는 오아시스였고, 선생님은 언제나 상처받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의 손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 시대를 변혁한 큰 업적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한 알의 작은 좁쌀(一粟子)로 자처하며 사셨습니다. 원주시 봉산동의 그 누옥에서 오로지 먹과 벼루와 붓과 화선지를 벗삼아 한낱 이름없는 선비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참으로 고결한 삶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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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