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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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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의 일생을 두고 관통하는 습성의 하나는 겸손이다. 사회적 위상과 명성이 따를수록 더욱 겸양하고 겸손하였다. 좌우명도 '겸손'이었다.

겸손의 덕목에는 부드러움을 빼놓을 수 없다.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장사상의 발현이었다. 5공시대 이런 주장을 폈다가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부드러움의 철학은 실천적으로 나타났다.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좁쌀 한 알」)

장일순은 중년 이래 만성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자신을 치료해 주는 이비인후과 원장(강대형)에게 글씨 한 폭을 선사했다. "목에 힘 빼 그래야 살아"라는 내용이었다. 원장이 목에 힘 주는 의사가 아니라 친절하기로 알려진 분인데도, 이런 선물을 하였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나 관리, 한살림운동 관계자 등 누구에게나 겸손할 것을 당부하였다. '목에 힘 빼'는 그야말로 그의 인사말이 되다시피 하였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온전한 도리는 겸손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사람 관계 뿐 아니라 자연과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었다.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 무위당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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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설 때나 사람들을 만나면 노자의 물처럼 살라고 당부하였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선 둥글고, 모진 데선 모지다. 많이 모아도 물, 작게 갈라놓아도 물이다. 끓여 증발해도 물이요, 얼어도 물이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지만 끝내 자기를 잃지 않는다. 또한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한 방울의 물은 아무 것도 아니나 바다의 성난 파도는 무섭다. 즉 가장 유약한 것이 가장 강할 수 있다."

전두환의 광기가 펄펄 날뛰던 시절, 대한성공회 광주교회 김경일 신부가 원주로 장일순을 방문하고 소감을 남겼다.

"장일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첫 인상은 맑고 큰 눈 때문에 유순한 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시국과 정치에 대해 조근조근 말씀하실 때면, 크고 오똑한 코가 철학이 분명한 강직한 정치가라는 느낌을 주었고, 선시를 읊고 노자를 말씀하다 동학으로 넘어가서 예수의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는 지경에 이르면, 종교의 경계를 넘어가서 그 본질에 들어가 일반 종교인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계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 1)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 신부의 '장일순 관'이 아니라 그날 있었던 다음의 대담 내용이다. 

"선생님!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군사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몽땅 잡아들여 한꺼번에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명단 작성에 들어갔다고 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당국에서 혹 실수로 내 이름을 빠뜨릴까 걱정이네. 그거야말로 큰 망신 아닌가? 사람들이 전두환을 겁내지만, 그 사람이 사람 죽이는 거 외에 무얼 알겠는가? 군대라는게 그런 것 아닌가? 그 정도는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굴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석 2)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물리쳐야 한다는 신념이고 철학이었다. 다음과 같은 비화도 전한다.

1970년대 중반 원주와 연고가 없는 김 모씨가 낙하선 공천으로 원주 지역구 여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시내 고급 술집에서 원주시장을 비롯하여 지청장, 지원장, 경찰서장 등 권력기관장들과 지역인사들이 함께하여 축하연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기관장들이 당선자에게 술을 먼저 따르면서 설설 기니까 무위당이 화를 벌컥 내며 '김의원, 이분들 덕에 당선되었으니 당신이 먼저 술을 따르시오. 대접만 받지 말고 먼저 대접하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가면서 술집 주인에게 부탁하여 술값을 외상으로 하고 절대 다른 사람의 돈은 받지 말라고 다짐을 하고 갔어요. 나중에 이를 알고 경찰서장이 돈을 싸들고 무위당을 찾아갔지만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술값이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무위당이 무일푼인 사정을 잘아는 전 중앙의원 원장 이관형(작고) 씨 등이 나중에 슬그머니 대납했어요.

당시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 때였는데 무위당은 지역출신도 아닌 사람이 관권선거 덕에 당선되고도 유권자인 지역민을 우습게 보는 데 대해 분노했던 것이지요. 지금 같으면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지방정가의 현실이었습니다.
(주석 3)

앉았던 자리에 향기는 못남기더라도 추악한 X냄새를 남기는 각계의 지도자라는 인물들이 있다. 두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던 자들이 법망에 걸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00년 1,000년이나 살듯이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검은 돈을 긁어 모은다. 심지어 국가정보원의 특수활동비까지 뇌물로 챙기면서 입만 열면 '국가안보' 운운하는 파렴치들도 보았다.

장일순이 활동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전두환ㆍ노태우 정권기 공권력은 '산적의 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세우기는 정의라는 깃발을 들었다.

당시 집권당이 민주정의당이었다. 가장 비민주적이고 반정의, 불의한 집단이 모여서 만든 당명을 민주정의당이라 이름 한 것은 희대의 코미디였다. 그런데도 정치꾼들은 물론 학계ㆍ언론계ㆍ법조계 등 엘리트들이 들어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거나 고위 관료가 되어 으시댔다.

주석
1> 김경일,「불욕이 정천하 장차정(不欲以 靜天下 將自定)」,『무위당 사람들』, 28호, 2009. 5. 
2> 앞과 같음. 
3> 윤원제,「누구나 끌어 안고 생명을 소중히 여긴 무위당」,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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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