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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추모비 건립 당시의 장일순 선생 최시형 추모비 건립 당시의 장일순 선생
▲ 최시형 추모비 건립 당시의 장일순 선생 최시형 추모비 건립 당시의 장일순 선생
ⓒ 모심과 살림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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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해월 최시형이다.

얼마나 해월에 대한 연구에 열심이었던지 '걸어다니는 동학', '살아 있는 해월'이란 소문이 따랐다. 그의 집 안방 아랫목에는 언제나 해월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었다. 최시형은 동학 1세 교조 수운 최제우와 함께 근대의 문을 연 선구자이다. 반봉건ㆍ척왜척양의 근대적 민족주의자일 뿐 아니라 앞에서 소개한대로 생명사상의 원조이다.

장일순은 수운 처형 후 강원도 산간지방을 누비며 37년 동안 동학의 포교와 민중 계몽에 앞서다 원주에서 관군에 붙잡히게 된 해월에 관심이 많았다. 『용담유사』와『동경대전』 등 교조의 경전을 간행하여 동학사상을 완성하고, 이와 함께 독창적인 생명사상을 이루어낸 인물로 인식한 것이다. 

측근들에 따르면, 말년에 장일순은 해월 선생을 닮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나 찾는 사람 또는 초청 강연 때는 늘 해월의 사상과 신앙ㆍ철학을 강조하고 그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해서 '살아있는 해월'이란 말이 스스럼없이 나왔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피체지 길목에 세워진 추모비와 장일순 선생의 글. 장일순 선생의 모심 사상(밑으로 기어라) 은 동학의 한울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피체지 길목에 세워진 추모비와 장일순 선생의 글. 장일순 선생의 모심 사상(밑으로 기어라) 은 동학의 한울님에 뿌리를 두고 있다.
▲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피체지 길목에 세워진 추모비와 장일순 선생의 글. 장일순 선생의 모심 사상(밑으로 기어라) 은 동학의 한울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피체지 길목에 세워진 추모비와 장일순 선생의 글. 장일순 선생의 모심 사상(밑으로 기어라) 은 동학의 한울님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최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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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은 1898년 3월 17일 오랜 포교활동 끝에 원주시 호조면 고산리 송골의 원진녀 집에서 관군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한성감옥에서 72세에 사형되었다.

장일순은 오래 전부터 해월을 기리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급한 일들에 쫓기다보니 겨를이 없었다. 고난의 역사에서 해월은 그냥 묻혀선 안되는 선각자여서, 무엇이든지 현세와 후세인들에게 선생의 작은 족적이라도 알리고자 하였다.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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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추진한 것이 선생이 피체된 현장에 추모비라도 세우기로 하였다. 천도교나 학계에서 해야 할 일을 그가 맡고 나선 것이다. 원주의 제자 그룹 중에 '치악고미술동우회' 회원들이 모금을 하고 헌신하여 마침내 일이 성사되었다. 이 행사에 참여했던 박경종 치과의원 원장의 증언이다. 

1990년 4월 12일에 제막식 행사를 가졌어요. 그날 선생님이 감격하셔서 울먹울먹하신 모습이 눈에 선연합니다. 고산리 주민들도 무척 좋아했어요. 그날 아침에 비가 많이 내려서 급하게 고산초등학교 강당으로 행사장을 옮겼어요. 제막식에는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특히 민주화운동을 한 재야인사들이 많이 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행사장 주변에 사복형사들이 쭉 깔려서 감시하기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당국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날 해월 선생의 증손자인 최정간 씨도 참석했어요. 이분은 경남 하동에서 도예를 하시는 분이셨는데, 선생님이 너무 고마워하셨어요. 제막식 끝나고 고산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해월 선생에 대한 강연도 하셨죠.

그날 저녁에 원주 시내 식당에서 선생님 모시고 술을 먹었는데 선생님이 제일 많이 취하셨어요. 기분이 너무 좋으셨는지 노래를 두 곡이나 부르셨어요. 해월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관의 추적을 피해 3개월간 숨어 지내다가 체포될 때까지 은거했던 원진녀라는 분의 집터도 '치악고미술동우회'에서 찾아냈어요.

해월 선생 추모비를 세우고 7개월 뒤인 1990년 11월 1일에 집터에 피체지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이때도 선생님이 무척 감격스러워하셨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고미술동우회와 고산리 주민들이 역사적 현장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해 줄 것을 원주시에 건의해서 2008년에 복원하게 되었죠.
(주석 1)

고산리 고산초등학교에서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서 장일순은 인사말을 통해 해월 선생의 업적을 평가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내용이지만 다시 소환한다.  

최시형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거룩한 스승 아닙니까? 그분이 안계셨다면 3ㆍ1만세운동이라든가 망국의 한을 갖다가 어디에 기초하고 뭘 할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분이 계셨기에 손병희 선생이 계셨고, 또 3ㆍ1만세운동도 됐고, 또 하나는 아시아에 있어서 뭐냐하면 식민지 상황에 있던 중국이라든가 인도에도 커다란 각성운동을 준 게 아닙니까? 그래서 최시형 선생이 대단한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석
1> 박경종 증언, 『무위당사람들』, 2017년, 1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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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