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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이 겪었던 특별한 일, 그들이 갖고 있는 특별한 사연과 특별한 추억. 그래서 그 삶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정철의 특별한 만남>은 그들에게 듣는 특별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 시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문재인. 그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떼어서 보긴 어렵습니다. 노무현과 청춘을 함께한 노동-인권변론과 민주화운동,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참모, 마지막 비서실장, 서거 전 마지막까지 노무현을 지킨 사람. 그리고 그의 서거를 비통한 표정으로 국민들에게 알린 사람. 그리고 이제 노무현의 추모기념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특별한 만남'의 첫 상대로 그를 찾아간 것은, 의외로 그 자신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둘만의 '특별한 만남'은 지난 11월 29일, 부산 법조타운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조현오 청장 망언, 피고소인 조사조차 안 돼... 특단 행동 강구할 때 됐다"

 문재인 (재)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19일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서 추가공사를 완공한 뒤 설명하면서 봉분 역할을 하고 있는 너럭바위를 손으로 만져보고 있다.
 문재인 (재)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지난 5월 19일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서 추가공사를 완공한 뒤 설명하면서 봉분 역할을 하고 있는 너럭바위를 손으로 만져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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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철](이하 양) 최근에 조현오 청장 망언, 노 대통령 묘역훼손 등 불미스런 일이 계속 이어져 누구보다 마음이 많이 불편하시겠습니다.
[문재인](이하 문) "그렇죠. 조 청장 건은 지금 우리가 고소-고발한 지 거의 3개월 반 정도 돼 가는데 아직도 피고소인 조사조차 되고 있지 않거든요. 계속 이렇게 늦어지게 되면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검찰의 수사지연 또는 직무유기를 규탄하는 특단의 행동을 강구해야겠죠. 그럴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양] 최근 재단 이사회에서 묘역 관리체계 보완책도 마련됐죠?
[문] "묘역관리 인원을 세 명 정도 늘려서 교대로 상주하도록 보완책은 마련했어요. 그러나 국가보존묘역이니만큼 국가가 기본적인 관리나 경비를 제대로 해야겠지요. 그 부분은 관련 법 개정이 국회에 제출됐고, 이번 정기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법 개정이 된다 해도 경비나 관리로 그런 일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결국 보복과 적대적인 정치문화,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그저 타도하려는 정치문화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법이겠지요."

[양] 권양숙 여사님 충격이 더 크실 텐데 괜찮으신가요?
[문] "아니요. 묘역훼손 사건은 그 자체로 충격이 크셨고, 더군다나 유사한 모방 행위가 뒤따르지 않을까 아주 걱정이 많으시죠. 더 충격이 큰 것은 부엉이 바위에서 한 분이 몸을 던진 사건이죠. 아주 참, 가슴 아파 하셨어요.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게 결코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행위가 되지 못 한다, 오히려 누가 된다, 그리고 유족들 마음을 아주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양] 노무현대통령기념관 건립 작업이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문] "현재 권양숙 여사님이 머물고 계신 사저를 적절한 시기에 재조성해, 노 대통령 퇴임 이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기념시설로 만들어 개방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습니다. 또 봉하에 추모영상관이 있는데, 가설 건축물로 허가받은 것이거든요. 그 시설을 보다 제대로 된 건축물로 확대해서 하나의 기념관으로 꾸민다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서울에도 시민들이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노무현센터 같은 게 필요하다는 의견인데, 아직 부지나 콘셉트 등에 대한 합의, 마스터플랜 같은 건 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재단에서 관련 기구를 만들어 앞으로 논의를 해 나가야 될 일이죠."

[양]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난감한 요청을 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여전히 같은 원칙을 갖고 계신 거죠.
[문] "네."

[양] 그 이유도 여러 번 언론에 밝힌 내용에서 변함이 없으세요?
[문] "네."

그는 이 두 질문에 대해 아주 짧은 단답형으로 답했습니다. 어떤 설명이나 사족도 달지 않았습니다.  

대선후보? "그렇게 현실성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

[양] 대선후보로 나오면 좋겠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문] "많기야 하겠어요? 저를 괜찮게 생각하는 분들이 일부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지 모르겠는데, 음…. 그렇게 현실성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양] 지난 지방선거에서 노 대통령을 모셨던 분들의 약진은 참 반가운 일인데요. 그들에게 장차 뭔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요청받으신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특히 다음 선거에서 민주진영전체의 승리를 위해선 어떻게든 역할을 하셔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실 것 같은데요.
[문] "우선 우리 진보-개혁진영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해야 된다, 이런 점에 대해선 전혀 생각이 다를 바가 없어요. 또 거기에 필요한 기여를 누구나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꼭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더라도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 도울 수 있는 역할이 다 있다고 생각해요. 나 같은 경우는 두 가지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해야죠.

하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추모 기념사업을 통해 노 대통령에 대한 정신이나 가치를 붙잡고 확산시켜 가는 일이죠. 그런데 이건 노 대통령 개인에 대한 단순한 추모나 기념에 그치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이명박 정부가 워낙 비민주적이고 퇴행적이고 폭압적인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잖아요? 그런 부분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대비시켜서 심판하는 일에 대해선 역시 노무현 정신, 노무현 가치와 대비시키는 것만큼 적절한 방법이 없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났죠. 그렇게 간접적으로 도움이나 역할을 하고요.

또 하나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참여정부나 노무현 대통령에 머물러선 안 되죠. 뛰어넘어야 되죠. 참여정부도 한계가 있었고, 역량 부족도 있었고, 실패한 부분도 있고요.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성찰해야 우리의 집권능력과 국정능력이 커지면서 집권가능성도 커지는 거죠. 그러려면 참여정부 5년에 대해서 정말로 굉장히 꼼꼼한 복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참여정부에 대해선 그나마 긴 시간 동안 깊이 있게 몸을 담았기 때문에 꼼꼼히 복기하는 일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어쨌든 정치일선에 나서는 건 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모셨던 분들이 성공을 거둬서 기쁘고, 이분들이 앞으로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분의 정치를 돕는 일은…. 저는 대통령님 정치를 도왔던 것으로, 저로선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양]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이 힘을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어떠세요?
[문] "원론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동의하고요. 추진 방법에 있어선 개인적으로 문성근씨가 하고 있는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그걸 지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 모습을 뵀는데 참혹했다... 충격, 아직 이겨내지 못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전 청와대 비서실장)가 20일 합정동 재단 사무실에서 내달 1일부터 열리는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행사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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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현안에 대해선 충분히 물어본 것 같아 개인적 영역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과의 애잔한 추억과 잔영이 궁금했습니다.

[양] 노무현 대통령 서거 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였고,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으세요?
[문] "서거전이라 하면 나로선 애매한 게 있는데, 부산대 양산병원에서 뵀죠. 그때 비록 인공적인 생명연장 장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때 살아계셨고 심장박동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나중에 여사님 동의를 구해서 인공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돌아가신 것이어서 그때 마지막 모습을 뵀는데, 그때는 참, 참혹했죠. 참혹했고…. 그래서 정말로 황망한 속에서도 '아, 이 모습대로 여사님 보여드릴 수는 없는데 어떡하나' 하는 그런 걱정이 제일 컸어요.

그리고 사고 이전에 마지막 뵌 게 언제냐면, 한 일주일 이전으로 기억납니다. 그때는 (서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그때만 해도 검찰의 소환조사까지 다 끝난 상황이었고, 검찰이 어떻게 사건 처리를 할지 예상하면서 대응을 논의하고 있었어요. 그런 대응에 대해서 대통령님도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그때 이미 우리는 구속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예상하면서, 검찰이 체면상 기소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는 수준이었죠. 그러나 기소해도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충분히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어요. 대통령도 확신하셨고.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양] 그때 제 기억으로는, 봉하에 있던 참모들이 서거 전 마지막 주말에 이사장님과 전해철 전 민정수석이 한번 내려오셨으면 했는데, 당시 두 분 다 굳이 오실 필요가 없는 상황이어서 아쉽게도 한 번 더 뵙지를 못했었죠? 
[문] "그 마지막 일주일을 안 갔던 것이 굉장히 큰 회한으로 남아 있는데…. 내가 그때 갔다고 해서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아니라…. 우리 대통령의 스타일을 다 알지만, (유서내용이) 굉장히 가다듬은 거잖아요. 대통령 글 쓰시는 스타일이, 일단 많이 써 놓고 압축하면서 가다듬어 나가는 그런 스타일인데…. 유서를 보면 굉장히 가다듬은 것이 보이거든요. 심지어 유서의 맨 첫 번째 문장,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그 문장은 컴퓨터로 작성하면서 다른 내용 다 입력해 놓고 나중에 추가해서 입력한 것이거든요. 말하자면 머릿속에 유서를…. 언젠가는 모르지만 적어도 며칠은 머릿속에 담고 사셨다는 건데…. 우리는 그걸 까마득하게 몰랐던 거지요."

아차 싶었습니다. 괜히 한 질문이었습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던 그의 눈가가 금세 충혈됐습니다. 말이 자주 끊겼습니다. 서거 전 주말에 한 번 더 못 뵌게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지 않느냐는 정도의 질문이었는데, 그때 찾아뵙지 못한 것이 그에겐 깊고 깊은 자책과 회한과 통한으로 남아 있었던 겁니다.

"그때 안 갔던 것은, 검찰이 아무 조치를 안 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응회의 같은 것이 오히려 대통령께 스트레스 드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리고 대통령님도 가족들 얘기가 불거져 나온 것에 대해, 우리한테도 참 민망해 하셨어요. 그래서 자꾸 가는 게 대통령을 오히려 힘들게 만드나 싶어서, 검찰이 저러고 있는 사이에 좀 잊어버리고 계시라고 안 갔던 건데…. 그 기간 동안에 대통령 혼자서 머리속에 유서를 담고 사셨다는 생각을 하니까 진짜…." 

[양]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충격이 크셨을 것이고 가장 참혹한 일들을 가까이서 겪어서 트라우마가 더 컸을 텐데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문] "나는 아직 이겨내지 못했어요. 여전히 인생이나 세상사가 참 허망하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진짜 참 세상이 무섭죠.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는 일절 사회적 활동은 다 접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은 심정인데요. 노무현 재단, 추모기념사업, 이런 일들은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냥 참고 견디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내 별명은 '문제아'...법률가 된 건 진짜 아이러니"

[양] 노 대통령 처음 만나신 게 82년이셨죠? 거의 반 정도 인생역정을 함께 해 오신 셈입니다. 이사장님 인생에서 노 대통령은 어떤 의미인가요?
[문] "청와대 생활이 하도 고생스러워서 청와대 퇴임하면서 '이제는 해방'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일부러 집도 양산 시골로 이사를 갔던 거고. 어쨌든 앞으로는 여유 있게 내 삶을 살면서, 퇴임하신 대통령 일을 도울 수 있는 정도에서 도와드리고, 좀 여유 있게 살려 했는데 결국 지금도 노무현재단 이사장하고 있지요. 나야 말로 '운명이다' 싶네요." 

[양] 어려서부터 모범생이었죠?
[문] "대체로 공부는 잘한 편이었는데, 모범생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양] 정말인가요? 안 믿기는데요?
[문] "내 별명이,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아'였어.(웃음) 학칙 같은 거, 이런 식의 규칙들하고 잘 안 맞더라고요. 내가 법률가가 된 거는 진짜 아이러니한 거예요. 실제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도 늘 처벌당하고 그랬었어요. 내가 상을 받게 된 것은, 군대 가니까 상 주더라구요. 어쨌든 모범생이진 않았어요." 

[양]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부모님이 원래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죠? 
[문] "고생했고, 극도로 가난했지요. 그 가난 속에서 부모님들이 정말로 참 대단한 교육열로 공부를 시켜준 덕분에 이렇게 됐죠." 

[양] 왜 법대에 가셨습니까? 처음부터 법률가가 되길 원했나요? 
[문] "법률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사실은 내가 하고 싶어 했고, 학교 다닐 때도 제일 좋아하고, 또 성적이 좋았던 게 역사 과목이어서,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죠. 그러나 그때 우리 집안 형편이 '학문을 하겠다' 이런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어서 승부가 빠른 쪽을 선택했지요." 

[양]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운동의 길로 접어들었습니까?  
[문] "그 당시에는 고시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현실에 대한 영합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그런 삶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게다가 유신헌법이 생기고 나니까 갑자기 모든 법 교과서가 바뀌는 거예요. 법전도 바뀌고. 그 전까지 공부했던게 다 소용 없었어요. 우리 헌법학을 가르쳤던 교수님이 그 긴 휴교 기간 동안에 유신헌법 책을 다시 쓰시고는, 복교가 됐을 때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하고 눈을 마주치지를 못하는 거예요. 강의 내내 천장을 쳐다보면서 하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법학이 학문이냐?' 그런 식의 회의가 아주 강했지요.

그래도 남 앞에 나서는 걸 잘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체질이었어요. 아마 내가 서울법대 정도의 분위기 같았으면 워낙 운동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중간쯤 따라다니는 것으로 끝냈을 텐데요. 그 당시 경희대학교가 학생운동이 참 약했어요. 말하자면 누군가가 앞장을 서줘야 되는데, 따라다닐 사람은 많지만 앞장서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지요." 

[양] 특전사 출신이시죠? 저희 대학 다닐 때엔 강제징집으로 특전사 입대한 일은 거의 없는데요. 어떻게 강제징집으로 특전사를 갔나요? 
[문] "구속이 돼서 제적을 당하고 집행유예로 석방이 되니까 영장이 나온 거예요.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태에서. 그때 강제징집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전부 나처럼 시위를 주도했거나 집시법 위반, 이렇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들 최전방 또는 기갑부대 이런 쪽으로 보내서 고생하도록 했어요."

[양] 입대해서 수중폭파, 스킨스쿠버 등 (신체적으로) 강한 남자가 돼서 나오신 거 아닌가요?
[문] "나는 특전사가 체질에 맞았어요." 

[양] 그래요? 어떤 면에서요?
[문] "내가 군인으로서 굉장히 자질이 있더라고요. 전혀 몰랐던 능력이었는데, 사격 특등사수, 수류탄 투척선수, 전투수영, 거기다 공부까지. 부대 안에서 한자 제일 많이 알고, 영어도 제일 많이 알고. (웃음) 어쨌든 아주 유능한 군인이었어요."

사법연수원 차석이 굳이 부산으로 내려온 이유는?

[양] 사법연수원 차석으로 사법고시 합겨했는데, 굳이 부산으로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문] "성적도 괜찮았지만 (사법고시 합격자가 적었던 시절이라) 누구나 임용되던 시절이고, 바로 변호사를 하는 게 아주 드문 시절이었어요. 성적이 좋았는데도 변호사 바로 하게 됐다고 하니까 제일 큰 로펌을 비롯해서 몇 군데 로펌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었어요. 당시로선 파격적 조건들이 근사했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일반 사건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쪽을 선택하지 않고 따로 개업하기로 하고, 서울이냐 부산이냐 저울질 하고 있을 때 노 대통령님을 만난 거지요. 노 대통령님하고 동업을 선택하게 되면서 부산을 오게 된 것이고. 그러지 않았어도 부산에 왔을 겁니다." 

[양] 물론 인권이나 민권 노동 쪽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던 게 컸겠죠?
[문] "그렇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고시를 한 것이고, 고시나 변호사의 길도 그 연장선에서 하고 싶었죠."

[양] 학교 다닐 때 사모님 만나셨던 건가요?
[문] "네." 

[양] 성악을 전공하지 않으셨나요? 사모님이?
[문] "캠퍼스 커플이에요." 

[양] 사모님도 운동을 같이 하셨나요?
[문] "아까 내가 주도했다던 비상학생총회에 참석했었어요. 그런 집회에선 여학생도 한 명 나와서 발언해야 하지 않습니까? 시국토론이니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거지만 (주최 측은) 중간에 발언이 끊길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발언자들을 준비하고 하잖아요? 그때 여학생도 필요하니까 우리 집사람하고 집사람 친구 과대표 하는 두 명한테 부탁을 했었어요. 그때 알았어요. 교제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고. 우리 집사람은 대학교 1학년 때 나를 만났고, 그 때 나는 곧바로 구속됐으니까 집사람은 내 면회 다니는 것으로 나를 사귀기 시작했지요. 군대 면회 오고 나중에 해남 절에 가서 공부도 했는데 거기도 면회 오고."

[양] 변호사 하길 잘했다는 사건들이 많으실 텐데 기억에 남고 보람에 있는 사건은 뭐죠? 
[문] "부산 경남 울산 창원 전체에 인권변호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나하고 고작 서너 분 계셨는데, 다른 분들이 정치로 들어가고 난 다음엔 나 혼자 남았었거든요.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울산 창원 거제 이런 쪽의 시국사건 노동사건을 내가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지요. 대한민국에 나만큼 노동시국 사건을 많이 한 변호사 없어요. 그런 중에서 대체로 학생들 사건보다는 노동사건이 보람 있었지요. 노동사건은 그 사람들의 삶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고생은 해도 보람이 크죠. 기분 좋았던 건 해고당한 퇴직자들이 무효소송에서 이겨서 복직될 때죠."

[양] 문재인하면 도덕성, 원칙, 강직, 권력과 사심을 추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기절제나 관리가 힘들지 않습니까?
[문] "그게 쉬운 거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유연하게, 능력 있게 하는 게 어려운 것이지, 지키기만 하는 게 제일 쉬운 거죠." 

[양] 청와대 계실 때 재산공개 보니까 많이 벌어놓지 못하셨던데 경제적으로 괜찮은가요?
[문] "대체적으로 괜찮지 못하지요. 괜찮지 못하다고 하면 더 힘든 서민들께 욕 들을 얘기지만. 어쨌든 내가 그동안 저축이 있었으면 변호사도 당분간 하지 않고 살고 싶었는데, 저축 조금 있던 것을 청와대 있을 동안 다 까먹었어요. 나는 늘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생계상 변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아마 안 그랬으면 양산보다 더 깊숙한 시골로 들어갔을지 몰라요. 지금 집은 병행(시골생활과 변호사 출퇴근)이 가능한 정도로 잡은 거지요." 

문재인, 그에게 남은 소망은...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전 청와대 비서실장)가 20일 합정동 재단 사무실에서 내달 1일부터 열리는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행사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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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양산 가신 것은 평소 꿈꾸셨던 전원생활 때문만은 아니죠? 
[문] "그러기도 했고 청와대 있을 때 건강도 많이 상하기도 했구요. 또 건강 못지않게 우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잖아요. 정말로 열심히 했는데 평가 받지 못했고, 아주 가혹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게 됐으니 할 말 없게 됐고, 그래서 그때만 해도 여러 가지 허망하다는 생각도 했고…. 그래서 세상하고 조금 거리를 두면서 쉬고 싶었어요. 세상하고 영 그만둘 순 없고 양산 정도 간 거지요." 

[양] 지금 전원생활에 만족하세요?
[문] "나는 마냥 좋은데 우리 집사람은 서울출신이라서 아주 힘들어 하지요. 우선 적적해 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게다가 내가 없으면 무섭기도 하고. 마당에 뱀도 있고 방 안에 지네가 들어오기도 해요. 그 놈의 지네가 내 눈에 먼저 띄면 될 텐데 꼭 집사람 눈에 먼저 띄어요. 많이 적응이 되면서 다른 길이 없다고 체념도 하니까 요즘 많이 좋아졌네요." 

[양]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었고, 정치적 동지가 대통령이 됐고, 참여정부의 중추역할을 하며 보람을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 평판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계획이나 다른 욕심이 없으니 남은 소망이 뭔지 궁금합니다.
[문] "나는 참여정부 동안에 내가 충분히 해야 될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국정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는데요. 능력이 있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있는 힘을 다했어요. 정말로, 건강도 다 상하면서 내가 가진 역량을 다 바쳤다고 생각하거든요.

퇴임하고 난 이후에는 세상하고 거리를 두면서 조용하게 살겠다고 생각했고, 양산 들어간 것도 2008년 2월 25일 날 대통령 퇴임하는 날이었어요. 대통령 모시고 봉하 갔다가 귀향행사 끝나고 밤늦게 양산에 들어갔는데, 어쨌든 그것으로 일단 공적인 사회적 활동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조용하게 살겠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 이후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그런 일(노 대통령 서거)이 생겼고, 나와 대통령과의 관계라든지 참여정부에서 내가 했던 역할 때문에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는 상태라서,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요. 노 대통령 기념사업이 우리 대에 다 끝날 일은 아니겠지만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분명하게 토대를 구축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참여정부 5년에 대해서 뭔가 꼼꼼하게 복기하는 작업이 이뤄진다면 거기에 참여하는 정도가 내게 남은 소망이지요." 

※ 인터뷰 전문은 <양정철닷컴>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양정철은, 학생운동 출신으로 시민단체 간사, 미디어 전문기자, 기업간부를 거쳐 2002년부터 노무현대통령후보 언론보좌역을 시작으로 노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대선 후 대통령직 인수위 공보비서를 지내고, 청와대 국내언론 선임행정관, 국내언론비서관을 거쳐 홍보수석실 선임비서관인 홍보기획비서관을 3년 반 동안 지냈습니다.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을 서거 전까지 봉하에서 모시다, 서거 후엔 봉하전례위 실무총괄팀장으로 국민장과 안장식을 준비했습니다. <노무현재단> 설립준비위 사무국장으로 재단설립 작업을 한 후 <노무현재단> 초대 사무처장을 지냈습니다. 현재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을 맡고 있고, 1인미디어인 <양정철닷컴>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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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청와대에서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국내언론비서관 역임. <노무현재단> 초대 사무처장. 현재 <양정철닷컴> 대표 및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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