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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금성 박채서씨 A급 공작원이었던 그는 지난 6월 1일 새벽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 흑금성 박채서씨 A급 공작원이었던 그는 지난 6월 1일 새벽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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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0일 '박 전무'가 오랜만에 기자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지난 96년 이후 기자와 15년 동안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온 남북관계 주요 취재원 중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 근처에 세워놓은 박 전무 승용차 안에서 만났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차 안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박채서(56). 본명보다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흑금성 공작원'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안기부 203실(해외공작실) 공작원이었던 그는 권영해 안기부장이 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안기부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요시찰' 대상이었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97년 대선을 앞두고 벌인 일련의 '비인가 공작'이었던 '북풍 공작'을 막아낸 숨은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98년 3월 권력 교체기에 권영해 부장과 이대성 해외공작실장 등 안기부 핵심간부들이 김대중 정부와 '거래'하거나 '협박'하기 위해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등을 짜깁기해 만든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공개하는 과정에서 '블랙'(흑색요원)이었던 그의 신원이 노출되는 바람에 그는 타의에 의해 공작원을 그만둬야 했다.

98년 6월 그는 국정원으로부터 해직 위로금조로 3억 원을 받고 나왔다. 국정원 창설 이후 최초로 북한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해 북한 최고위급에까지 접근한 A급 공작원에 대한 보상이었다.

영화와 다른 현실, 공작원 보호 프로그램은 가동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북한 보위부에 위장 포섭되어 김정일에게까지 보고된 남북경제협력사업을 진행한 그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이대성 파일'이 공개된 직후인 98년 4월 김영룡 보위부장(제1부부장) 등 흑금성과 연결된 보위부 간부들이 줄줄이 숙청되었다.

국정원이 도청해 그에게 전해준 일본 조총련(조선총련)과 평양의 통화내용은 "'박채서에 대한 보복행동을 시행해도 되느냐'는 조총련의 질의에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는 평양의 보류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류지시가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본 공작원 보호 프로그램은 현실에서 가동되지 않았다. 신분이 드러난 뒤에 가족을 보호해온 국정원 경호팀은 해고 이후 예고 없이 철수했다. 어디에 물어도 '답'이 없었다. 현 정부는 전 정권의 일로, 현 국정원은 전 안기부 시절의 문제로, 대공수사국은 해외공작실의 문제로 치부했다. 해외공작실은 이미 '북풍 공작' 수사로 이대성 실장 이하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된 상태였다. 그와 가족의 보호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98년 8월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중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중국 단동의 중간 연락책을 통해 그의 보위부 연락책인 평양의 리호남(56, 본명 리철)에게 "상호간에 정리할 것이 있으니 만날 용의가 있으면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리철은 건재했다. 9월 첫째주에 가능할 것 같다는 답이 왔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국정원에 '보안서약서'를 쓰고 나올 때 받은 비상연락망 전화번호 2개로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9월 4일 혈혈단신으로 출국해 베이징의 스위소텔 1층 커피숍에서 리철 일행을 만났다. 항상 리철과 함께 나온 그의 북측 파트너였던 보위부 김영수 과장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앞으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단도직입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약속한 것은 지키겠다. 목숨이 아깝지 않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이 바닥에 뛰어들 때부터 나는 각오한 몸이다. 다만 부탁하건대, 나 하나만으로 해결하자. 처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식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북 최고위층 "그도 국가에 충성한 것밖에 더 있느냐, 통 크게 봐줘라"

그날은 그 외에 특별한 얘기가 별로 없었다.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만난 리철은 상부에 그의 얘기를 보고하고 그 결과를 전해주었다. '최고위층'의 재가가 난 것으로 보였다.

"그 사람(박채서)도 자기 조직과 국가에 충성한 것밖에 더 있느냐. 통 크게 봐줘라."

복잡한 얘기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 진의는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와서 직접 대놓고 대화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도 당시로서는 보안서약서를 어기고, 북한측 상대를 다시 만난 이후에 벌어질 후유증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97년 2월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광고기획사 '아자'의 박기영 대표와 금강산관광총회사 박종삼 총사장이 북한에서의 광고촬영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이 '아자'의 전무로 위장한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씨.
 97년 2월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광고기획사 '아자'의 박기영 대표와 금강산관광총회사 박종삼 총사장이 북한에서의 광고촬영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이 '아자'의 전무로 위장한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씨.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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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그는 리철을 매개로 ▲'아자'라는 광고회사에 위장취업해 그 회사의 전무 직함으로 추진했던 광고사업(북한 전역에서 5년 동안 광고촬영)을 재추진하는 한편 ▲조명애-이효리 삼성전자 휴대폰 광고사업 ▲이산가족 북한방문 및 가족상봉 알선 ▲개성 골프리조트 건설사업 등을 사실상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묵인 하에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대북 비선으로 활동하면서 남북관계에 많은 기여를 했고,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도 여전히 대북 비선으로 활동했다.

그는 대북사업에 관여하다가 몇 년 전부터 베이징에서 중-한(中韓) 골프대회를 개최하면서 베이징에 장기 체류해왔다. 그는 3개월마다 여권(비자)을 갱신하기 위해 서울을 찾는 터였다. 서울에 올 때마다 기자와 휴대폰으로 '소통'을 했지만 직접 대면은 1년에 두세 번 꼴이었다. 더러는 기자가 먼저 전화를 하거나 보자고 할 때도 있었다. 그가 먼저 보자고 할 때는 뭔가 중요한 용무가 있다는 얘기였다.

지난 1월 당시는 김정일의 연초 '방중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시점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연초 '방중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이 시기에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다면 이제 더는 남한에 '구걸'하지 않고 중국과 상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서 "이는 '민족적 비극'이다"고 강조했다. 북한으로서는 식량난 해결이 시급한데 남측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어 자존심을 굽히고 중국을 향해 손을 벌리려 한다는 것이다.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현실화된 그의 북한 군부 '도발' 경고

그가 전한 두 번째 메시지는 지난해 10월 당시 싱가포르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진 북한 노동당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임태희 노동부장관(현 대통령 비서실장)의 비밀접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남북한 특사 비밀접촉설이 처음 언론에 보도되어 기자가 사실 확인차 전화를 했을 때도 "내 전화가 (정보기관에) 물려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면서도 "거론된 인사의 최측근이 싱가포르에서 접촉했다"고 귀띔했다.

그가 말한 '최측근'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 장관이었다. 그는 이어 "서로 아무런 안면이 없는 사람들(김양건-임태희)이 나와서 협상을 하다보니 보안도 (유지가) 안 되고 말도 새나갔다"면서 "협상이 어느 정도 잘 진행되었지만 아쉬운 쪽은 (식량 지원을 원하는) 북측인데 우리측에서 배짱을 부려 트러블이 생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북측은 비료 지원 10만톤을 요청했는데 남측이 내민 카드는 1만톤뿐이었다고 협상 분위기를 전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당(통전부) 우선이었던 대남 공작라인이 군부 중심으로 재편되어 호전적인 군부가 전면에 나서게 된 바람에 한반도의 전쟁 위험지수가 높아졌다는 우려였다. 즉, 노동당 소속이었던 작전부와 35호실, 그리고 인민무력부 소속의 정찰국을 통합해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어 김영철 상장이 '인민군 정찰총국 총국장'에 임명됨으로써 대남공작의 전면에 군부가 나설 것을 우려했다. 김영철은 2008년 12월 개성공단 입주업체 대표 150명을 불러모아 공단 폐쇄를 위협했던 인물이다

기존의 대남 공작활동은 노동당과 군부로 분리돼 있었다. 당 작전부는 공작원 기본 교육훈련과 침투 호송 및 안내 등을 맡아왔다. 노동당 35호실은 대남 정보 수집을 담당하면서 남한 및 해외에서의 테러 공작을 감행하기도 했다. 군 총참모부 소속 대남기구인 정찰국은 간첩 양성과 남파를 임무로 하면서 요인 납치 및 암살과 전략시설 정찰 등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 셋을 통합해 대남 공작활동 전면에 군부를 내세워 단선적 대남공작 지휘체계를 수립한 것은 그만큼 신속 강력하면서도 보안이 유지되는 대남공작이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사관학교 졸업후 국군 정보사 대북공작관으로 근무하다가 소령으로 예편한 뒤에 직접 국가정보기관의 공작원으로 북한에 침투해 활동한 그로서는 직감적으로 도발징후를 느꼈음 직했다. 그는 우리 정부와 군의 고위층에게도 북한 군부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천안함 침몰 사건'(3월 26일)이 발생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나의 신념과 가치에 대한 배반"

그는 지난 설에 귀국했을 때도 잠깐 기자를 만나고 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된 지난 6월 1일 새벽. 그는 일시 귀국했다가 자택인 서울 염창동 아파트에서 국정원 대공수사국 요원들에 의해 긴급체포되었다.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첩보전을 수행했던 '애국자'가 졸지에 '간첩'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50일 동안의 국정원과 검찰 수사를 거친 끝에 정리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주장하는 내용과 부합되려면 나는 북측에 정말 포섭되어야 하고 그런 전제조건하에서 그들의 지시나 지령을 받게 되고 국가에 해가 되는 자료나 군사, 국가비밀을 탐지하고 지령 받은 주요 인물들을 포섭해야 마땅하다.

북에 포섭되어 그들의 지령에 따라 내가 움직였다고 가정해도, 시간(길게 17년, 짧게 13년)과 내 주변 여건과 능력에 비해 그 성과나 국정원에서 주장하는 내용조차도 너무 빈약하다. 조사과정에서 국정원 수사책임자가 '10년 넘게 함께 하면서 교범 몇 권 건네준 게 다냐. 그것을 믿으란 얘기냐?'면서 화를 냈듯이 그 성과가 너무 빈약하다. 북측이 진짜 공작원이고 또 내가 국정원 주장대로 북에 포섭되어 북의 지령대로 움직이는 간첩이었다면 그 정도 성과로 만족하고 공작이 계속 진행되었겠는가?

분명히 밝히건대 나는 그들의 지시나 지령을 받은 적도 없고 그들의 지시나 지령에 따라 움직일 정도로 내 사상은 나약하지 않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의 적이고 유사시는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서로의 생명을 노려야 하는 적국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최근 면회를 간 기자에게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에 대해서는 실정법을 어긴 이상 처벌을 달게 받겠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은 내 인생과 자존심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에 정보사 공작단 공작계획 분석장교 및 공작관을 거쳐 국가정보기관의 A급 특수공작원으로 살아온 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자 신념과 가치에 대한 배반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1. 비밀공작은 대부분 불법성을 띨 수밖에 없지만 정보기관장이나 대통령의 공식적 인가 여부에 따라 '인가공작'과 '비인가공작'으로 나뉜다. 즉 정보기관 내에서조차 공식 인가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수행된 내부 불법공작이 비인가공작인 셈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권영해 안기부장이 비밀리에 추진한 '아말렉 공작' 등을 포함한 일련의 '북풍공작'이 대표적 사례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 위장포섭된 안기부 공작원 박채서씨는 '아자'라는 광고회사에 전무로 위장취업해 북한을 상대로 광고사업을 추진하는 '편승공작'인 '인가공작'(흑금성 공작)을 수행하는 중에 자신의 공작라인에 침투한 '비인가공작'(아말렉 공작 등)을 포착해 이들의 97년 대선 정치공작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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