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야구팬들이 31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SK와의 경기에서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두산 야구팬들이 31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SK와의 경기에서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3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08 한국시리즈 5차전. SK가 2-0으로 앞선 채 맞이한 마지막 9회, 무사 만루 찬스에서 고영민이 땅볼로 물러나고 마지막 타자는 김현수. 경기장은 역전을 기대하는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이번에야말로 김현수가 무언가 해줄 것이라는 기대로 경기장이 요동치는 듯 했다.

하지만 열광도 잠시. 마지막 장면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져서 지켜보는 팬들마저도 순간 정적에 빠져들 만큼 어리둥절했다. "현수야, 이번엔 한번 치자" 제대로 된 응원구호 한번 시작해보기 전에 김현수의 방망이는 초구에 성급히 허공을 갈랐고, 빗맞은 타구는 투수 앞 정면으로 가는 병살타로 마무리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절정에 달했던 그라운드는 순간 멍해졌다.

"뭐야, 이거?" "끝난 거야?"

마지막 힘을 다해 1루로 전력질주하던 김현수는 경기가 그렇게 끝난 뒤 한동안 그라운드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승부의 세계, 그것도 한 시즌의 최강자를 가리는 한국시리즈였지만, 하필 운명의 신은 스물 한살 어린 선수에게 유독 가혹한 멍에를 남겼다.

김현수, '신데렐라'에서 '희망고문'까지

 한국의 김현수가 16일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야구 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9회초 2사 1,2루 타석때 안타를 역전 안타를 치고 환호하고 있다.

지난 8월 16일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야구 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김현수가 9회초 2사 상황에서 역전 안타를 치고 환호하고 있다. ⓒ 유성호


김현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올해 프로야구 최고의 신데렐라 중 한 명이었다. 88년생으로 올해 프로데뷔 3년차였던 김현수는 2008 시즌 타율(0.357), 최다안타(168개), 출루율(0.454) 등, 역대 최연소 타격 3관왕에 오르며 소속팀 두산을 넘어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간판타자로 성장했다.

지난 8월 베이징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고비마다 맹타를 터뜨리며 타율 0.348(23타수 8안타) 4타점을 기록, 한국 타선의 히든카드로 사상 첫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스무살 어린 선수답지 않게 국제대회에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는 배짱, 좋은볼과 나쁜볼을 가리지 않고 걷어내는 그의 탁월한 컨택트 능력에 당시 극심한 타격부진에 시달리던 '국민타자' 이승엽이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치냐"고 타격 비법에 대하여 자문을 구했을 정도였다.

김현수는 한국야구사에 또다른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신일고 3학년 시절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고도 신인 지명을 받지 못한 김현수는, 2006년 신고선수로 두산에 입단하여 갖은 고생을 다 해야 했다. 그러나 젊은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는 김경문 감독을 만나서 2년의 숙성 끝에 마침내 올 시즌 야구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어린 선수답지 않게 웬만한 시련에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순박한 얼굴 뒤에 가려진 투쟁심, 그리고 두산 입단 이후 매일 천 개의 스윙연습을 거르지 않았다는 성실함 등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4차전부터 살아나며 플레이오프 타이기록인 5타석 연속 안타를 휘두르며 '역시 김현수'라는 찬사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초반 1승 2패로 뒤지던 두산은 플레이오프에서 4차전 이후 살아난 중심타선의 화력에 힘입어 내리 3연승을 거두고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거침없이 질주해온 김현수에게, 올해의 마지막 무대였던 한국시리즈는 생애 처음 맛보는 가혹한 시련을 남겼다. 한국시리즈 5경기에 모두 3번타자로 출전했지만 결과는 21타수 1안타(타율 0.048), 삼진만 7개. 정규시즌 '리딩히터'는 한국시리즈에서는 꼴찌에서 첫 번째 타자로 추락했다. 극과 극을 넘나드는 타격 성적표는 본인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팬들과 김경문 감독으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 3차전과 5차전에서는 연이어 9회 1사만루 찬스에서 승부에 찬물을 끼얹는 '닮은 꼴' 병살타를 기록하며 충격을 안겼다. 숱한 득점 찬스에서 번번이 허공을 가르는 김현수의 방망이는 터질 듯 터질 듯 안터지는, 안타 대신 속만 터지는 두산 팬들에게 있어서 '희망고문'과도 같았다.

그러나 아직 좌절하기는 이르다

 두산 김현수가 31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SK와의 경기에서 9회말 1사 만루 타석때 병살타를 쳐 아쉬워하자 이승학 선수가 위로를 하고 있다.

두산 김현수가 31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SK와의 경기에서 9회말 1사 만루 타석때 병살타를 쳐 아쉬워하자 이승학 선수가 위로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우승을 확정한 SK 선수들의 환호성보다 그라운드에 쓰러져 망연자실한 김현수의 표정이 더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숱한 시련에도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던 김현수는 결국 눈물을 쏟으며 주변의 부축을 받고 그라운드를 겨우 빠져나갔을 만큼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김현수가 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상대의 수비 시프트 때문이었다. 김현수의 타구가 주로 가운데로 향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상대팀 내야진들은 플레이오프 들어 수비 위치를 이동하여 김현수에게 압박을 주었다. 지난 한국시리즈 3차전 9회 때린 병살타도 만일 상대 수비 위치가 정상적이었다면 안타가 될 수 있었던 타구였다. 잘 맞은 타구들이 번번이 수비 직선타가 되거나 시프트에 걸리면서 김현수는 서서히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타구 방향을 의식하게 되면서 타격 밸런스와 자신감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내로라하는 타자들도 이런 수비 시프트에 골탕을 먹은바 있다. 국민타자 이승엽이나 SK 김재현, 삼성 양준혁 같이 한국야구사에 이름을 떨친 타자들이 상대의 타격성향을 철저히 분석하는 상대 수비진의 시프트에 가로막혀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수는 아직 21세의 어린 선수에 지나지 않았고, 하필이면 베테랑들에게도 최고의 압박감을 자랑한다는 한국시리즈 무대였다는 사실이 가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는 김동주와 홍성흔 등 베테랑 선수들은 제몫을 다한 반면, '김경문의 아이들'로 불리우는 주력 타자 3인방이 모두 제몫을 하지 못했다. 플레이오프 2년 연속 MVP를 수상한 이종욱은 한국시리즈 5경기에 출장해 22타수 5안타 0.227의 타율에 그쳤고, 고영민도 5경기 17타수 2안타 타율 0.118로 부진한 모습을 선보였다.

김현수까지 포함, 이들이 모두 베이징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좋은 활약을 펼쳐준 선수들이었기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젊은 선수들에게 한국시리즈가 주는 중압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SK가 31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승리해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두산의 김동주가 시상대에 올라와 준우승 트로피를 취재진을 향해 들어보이고 있다.

2008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준우승 트로피를 두산의 김동주가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타선의 엇박자 활약은 두산이 한국시리즈 5경기 동안 잔루를 46개나 남기고도 단 10득점(경기당 2.0점)에 그친 근본 원인이었다. 특히 승부의 운명을 가른 3~5차전에서 두산은 무려 26개의 안타를 때려내고도 단 3득점에 그쳤다. 두산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SK에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아직 좌절하기는 이르다. 김현수에겐 아직 미래가 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 이상 김현수는 한국야구의 중심타자로 활약할 수 있는 시간과 재능이 있다. 이번의 경험과 시련은 김현수에게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이후 적지 않은 안티팬들이 김현수의 병살타 행진을 비아냥대며 악플을 올리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김현수의 활약이 없었다면 두산은 올 시즌 아예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지도 못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한때 반짝한 뒤 큰 무대에서 당한 슬럼프의 충격을 잊지 못하고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스타들은 헤아릴수 없다. 김현수에게는 야구가 결코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치고, 한번 더 겸손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시련은 교훈일 뿐, 결코 실패가 아니다. 지나간 일은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한다. 팬들은 그가 내년에도 변함없는 두산의 3번타자로서 씩씩한 웅담포를 쏘아 올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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