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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 한성희
왕과 달라서 왕자란 어딘가 친근감이 간다. 얼마 전 네티즌 사이에 '얼짱 왕자'로 화제를 모았던 의친왕(고종의 차남)의 차남 이우공도 잘 생긴 미남왕자라는 것 외에 소신과 기개를 갖고 독립운동을 도왔고 일제에 항거했던 왕자였기에 더 인기를 모았다.

조선시대에 아까운 왕자를 꼽는다면 단연 소현세자와 효명세자를 들 수 있다. 두 왕자의 공통점은 살아서 왕으로 등극했다면 조선 후기 혼탁한 정치가 달라지고 조선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왕세자란 점이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삼전도 굴욕으로 청에 볼모로 끌려가 9년을 살았다. 소현세자는 조국을 위해 능란한 외교관 역할을 해냈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조선이 발전한다는 확신도 갖고 있었다. 돌아와서 두 달만에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 당하는 비운을 맞았고 뒤이어 세자빈 강씨도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인조는 친손주인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마저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려 그중 둘이 풍토병으로 죽는다.

효명세자(1809~1830)는 23대 순조와 순원 왕후의 원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탄생했다. 수릉(綏陵)은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이며 동구릉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

▲ 수릉은 동구릉 재실에서 가장 가까운 왕릉이다.
ⓒ 한성희
뛰어난 예술가였던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왕 중심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세자였지만 정재(궁중무용)를 집대성하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봄 꾀꼬리가 노는 것을 보고 창작했다는 춘앵전, 모란꽃을 들고 추는 대표적인 궁중무용 가인전목단, 고구려무, 향령무, 장생보연지무 등 정재를 집대성했다. 조선후기 정재에 황금기를 이뤘다는 공로로 문화관광부는 올해 11월의 문화인물로 효명세자를 선정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22세로 요절한 것이 아쉬운 것은 이러한 궁중무용을 집대성했다는 공이나 탁월한 예술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정조의 죽음으로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집권한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인재양성소였던 규장각을 축소해버리고 인재를 몰살해버렸다. 1800년 병환 중에 있던 정조는 죽기 보름 전인 6월 14일 김조순을 불러들여 적극적 정치개입을 비밀리에 요청했다. 이 일은 정조가 후기 세도정치를 불러들인 격이 됐다.

정조 사후 5년간 벽파 집권 이후, 일찍이 정조에게 세도를 위탁받았던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정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꿈과 비원을 외면해 버리며 이후 60년 간 안동 김씨 정국을 좌우하게 된다.

11세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시대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자리를 굳혀가는 시대였고,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정조의 유지를 받은 김조순이 주도권을 쥐게되면서 인사정책인 과거제도의 문란부터 시작해 정치는 혼탁의 극을 향해 치닫는다.

▲ 수릉 정자각
ⓒ 한성희
정사를 세자에게 물려준 순조

15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마음 약하고 착하기만 해서 물러빠진 순조는 뻔히 알면서도 세도정치권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때 순조에게 하나의 방책이 세자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일이었다.

순조 27년(1827) 2월 18일 순조는 "건강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정사를 소홀히 하고 지체시켰다. 이제 세자가 총명하고 영리하니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명했다. 대리청정을 명할 때 효명세자는 19살이었고 순조는 38세였다. 순조는 이미 15세의 효명세자에게 정무를 돌보게 한 바가 있었고 총명했던 효명세자는 개화파 학자였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등과 친분을 나누었다.

38세의 순조가 정사에 흥미를 잃은 것은 안동 김씨를 제압할 정치력이 없는데다 세도정치로 인한 민란과 수차례 천재지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809년부터 유례 없는 가뭄과 기근이 들었으며, 1813년 제주도 민란, 1815년 용인 이응길 민란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또 1821년 서해안에 전염병이 번져 10만 명이 목숨을 잃어 국정 전반의 혼란은 극도로 심했다.

순조가 정치를 전혀 돌보지 않고 뒷전에 물러나 있던 상태에서 세자에게 정사를 물려준 것이기에 이에 반대하는 대신들도 없었다. 안동 김씨를 제외한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은 효명세자에게 국가 기강을 바로 잡을 성군을 기대했다. 순조의 뜻을 잘 알고 있던 효명세자는 집권하자마자 철저하게 안동 김씨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순조는 자신의 힘으로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 효명세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효명세자가 4세가 되자 순조가 세자의 교육을 맡을 사부로 정한 사람은 좌의정 김재찬이었다. 안동 김씨를 견제할 유일한 인물인 김재찬을 선택한 것만 봐도 순조의 의도가 읽힌다.

효명세자는 총명했던 군주 정조를 빼닮았고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왕은 할아버지 정조였다. 시를 잘 짓고 궁중무용을 창작할 정도로 예술에 재능이 있었으나 스스로 자제하고 학문에 몰두하기 위해 '만기일력'라는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안동 김씨를 징계하기 시작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던 소론과 남인, 북인을 등용했다. 또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초반에 이른바 기존 대신세력인 삼사의 길들이기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맞서 처리하는 단호함을 보여 강력한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굳혔다. 안동 김씨에게 편중된 세력을 약화하려고 김조순 권력의 중심이었던 비변사 당상을 전부 감봉 조치해 타격을 주었다.

할아버지 정조를 본받아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려했던 효명세자는 안타깝게도 3년 3개월이란 짧은 대리청정을 끝으로 아버지 순조의 희망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효명세자는 조선이 마지막으로 회생을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이었지만 22살의 나이에 죽고 만다.

▲ 기오헌과 의두각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독한 왕자의 안식처 기오헌과 의두각

효명세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건물이 바로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이다.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 있는 17개 정자 가운데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해 지은 건물이다. 기오헌과 의두각이란 이름은 효명세자가 정조를 기대고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으로 그의 의중이 보인다.

화려한 궁궐 건축물 중에서 극히 소박해 보이는 이 두 채의 건물 중 왼편이 기오헌이며 오른편이 의두각이다. 기오헌은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과 누마루로 구성된 집이며, 의두각은 한 사람 몸을 누일 수도 없는 정면 2간 측면 1간으로 구성된 극히 작은 집으로 단청이 없다.

효명세자가 독서와 사색을 하기 위해 자주 들렀던 이곳은 북향집이며 기오헌과 의두각 뒤에 규장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왕세자답지 않게 지극히 소박한 이런 건물에 와서 독서를 즐긴 효명세자는 기오헌과 의두각에서 정조를 생각하면서 난국을 타개할 정책에 골몰하기도 했으리라.

효명세자는 학문을 좋아하던 왕자답게 12권 6책으로 구성된 경헌집(敬軒集) 6권과 학석집(鶴石集) 등 문집을 남겼다. 효명세자가 죽자 효명세자와 교유하던 서유영과 박규수 등 인재들은 과거를 포기하고 칩거에 들어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뜻을 펼 수 없다는 낙심과 세상에 나가기 싫은 선비의 곧은 마음이었으리라.

1830년 5월 6일 마지막 희망이었던 조선의 왕자 효명세자가 병으로 죽자 순조는 묘호를 연경(延慶)이라 하고 8월 4일 양주 천장산 의릉(경종) 왼쪽 언덕에 세자를 안장했다. 헌종이 즉위하자 아버지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해 연경묘는 수릉으로 바뀌며 왕릉이 된다.

▲ 못다 이룬 왕자의 쓸쓸함이 돋아나는 능상.
ⓒ 한성희
헌종 12년(1846) 5월 20일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시 양주 용마봉 아래로 옮겼으며 철종 6년(1855) 8월 26일 지금의 자리로 천장한 것이다. 건원릉 이래 마지막 9번째로 효명세자의 수릉이 옴으로써 동구릉(東九陵)이란 이름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시를 잘 짓고 현재 남아있는 궁중무용까지 창작했던 효명세자에게 자유로운 예술가다운 방랑자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살아서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그의 끼를 달랠 수 없기에 남달리 궁궐 밖으로 미행하기를 즐겼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박규수였으며 그들은 친구 이상의 우정과 학문을 교류했다.

다재다능했고 예술을 이해했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단호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던 효명세자는 죽어서 이렇게 3번이나 방랑한 끝에 동구릉에 잠들었다. 익종은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899년(광무 3년) 12월 19일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됐으며, 묘호를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바꾼다.

신정왕후(1808~1890)는 일찍 청상이 되었으나 헌종대에 풍양 조씨 세도정치를 펼친 근원이 됐다.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던 신정왕후의 뜻과는 달리 안동 김씨와 쌍벽을 이루며 백성의 민원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확장에만 힘써 결과적으로 혼탁한 정치를 가속시켰고 조선은 몰락의 길로 치달아 갔다.

▲ 비각의 글씨는 고종이 전서체로 손수 쓴 어필이다.
ⓒ 한성희
후에 조 대비(신정왕후)는 대원군과 손잡고 고종을 등극시켰고 83세로 장수를 누리다 죽어 효명세자와 합장됐다. 수릉 비각에는 고종이 전서체로 쓴 비문이 있어 고종의 어필을 감상할 수 있다.

왕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효명세자가 통치했던 동안이 순조의 왕권이 가장 강화됐던 시기였다. 다시금 수릉에 서서 펼치지 못한 효명세자의 부러진 날개를 생각해보며 '최고짱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본다. 조선 후기에 잠시 반짝였던 그의 짧은 생애가, 이내 사라질 저녁 해가 마지막 몸부림으로 쏟아내는 노을처럼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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