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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조국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릅니다. 새 생명이 만개하는 삼천리의 산하는 그에 뒤질세라 겨우내 꼭꼭 숨겨둔 푸름을 쉴 새 없이 토해냅니다. 5월은 응당 그런 시절이지요. 생명과 푸름과 희망이 넘실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엄마들의 잔소리가 집집마다 골목마다 그칠 줄 모르는 날들이 5월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던가요. 조국의 5월이 마냥 푸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여 년 전 80년 광주를 알고 나서, 그리고 5년 전 당신을 그리 떠나보낸 뒤로는 푸른 하늘에 스며든 핏빛이 지워지질 않습니다. 당신이 가시던 날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아직도 제 마음 속에서 멈추질 않고 있습니다.

2014년 5월의 대한민국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엄마들의 비통한 곡소리만 남았습니다. 한 달여 전 세월호가 침몰한 뒤 아직까지도 10명이 넘는 탑승객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상중입니다. 이 죽음의 행렬이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갑오년의 이 참사는 당신이 떠날 때부터 예고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겹도록 원칙과 기본, 민주주의, 합의, 소통을 강조하던 당신의 입바른 소리는 항상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지요. 우리 이만큼 민주주의 했으면 이제 좀 누리면서 살자는 바람은 당연한 욕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 쉽게 탐욕스런 위정자들의 먹잇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민주주의도, 남북관계도,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자만했던 것이 화근이었지요. '원칙과 도덕성이 밥 먹여 주냐'는 비아냥거림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라가 만신창이 되는 데 채 10년도 안 걸렸습니다

2002년 8월 21일 인터넷뉴스미디어협의회 간담회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2002년 8월 21일 인터넷뉴스미디어협의회 간담회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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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만신창이로 변하는 데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고소영 내각'에 입각하신 나리들 중 법을 어기지 않은 자를 찾기가 어려웠고 '영포라인'의 실세 형님들은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끌어다 쓰며 국정을 농단하였습니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국민들 호주머니를 털어 안 그래도 돈 많은 재벌들 살찌우기에 급급하더니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멀쩡한 4대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그 시절 기업들을 위해 완화했던 규제는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유화된 권력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간인 사찰과 선거부정으로까지 치달았었지요. 이 모든 악행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건 정권에 거의 장악된 언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고 뽑았던 MB는 오히려 미국 축산업자와 미국 자동차 노동자들을 위해 더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검역주권을 내팽개치면서까지 국민들에게 질 나쁜 쇠고기를 먹이려고 했었지요. 그는 정말 '뼛속까지 친일이자 친미'였습니다.

MB 정권의 모순을 모두 등에 업고 들어선 박근혜 정권은 태생부터 그 실패가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정권연장을 위한 '이명박근혜' 세력의 공작은 참으로 치밀하고도 대담했습니다. 안보 이슈를 선거 최대 쟁점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이들은 당신의 남북회담 대화록을 왜곡 편집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이 대화록은 여론조작의 콘텐츠가 되었고 국가정보기관과 군부대를 동원하여 군사작전 벌이듯이 여론을 들쑤셨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이명박근혜' 세력이 안보에 유능한 줄 알았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가장 큰 힘은 '종북 세력에게 나라를 넘겨줄 수 없다'는 5, 60대의 절박함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들의 안보능력은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화록 왜곡 편집과 같은 거짓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연평도 포격사건도 그러려니와, 그간 남한 주도의 관리체제로 진입하려던 남북관계는 전쟁위기로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북핵문제는 오히려 더욱 해결이 어려운 미궁으로 빠져버렸지요. 국가정보원은 국내정치공작을 일삼느라 대북정보수집능력이 확연히 떨어졌습니다. 그뿐입니까. 또 당신께서 추진했던 각종 전략무기 도입사업도 줄줄이 연기되었습니다.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에서 남한의 존재감은 극히 미미해졌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정말로 안보에 유능한 정권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국민 생명 못 구하는 대통령 권위, 버리는 게 옳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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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짓됨이 만천하에 탄로 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입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내해 얕은 바다에 빠진 배 한 척 어찌하지 못해 수많은 국민들을 수장시킨 정권이 무슨 염치로 안보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요? 사고발생 한 달이 넘도록 정확한 사고경위와 원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아니, 탑승객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고 초기 해경의 통신내용이 여태 모두 공개되지 않았다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무엇을 그리도 숨기고 싶은 걸까요? 국민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는 걸까요? 저들의 안보는 과연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요?

세월호 참사를 겪는 동안 위정자들이 권위주의를 버리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최소한의 권위는 있어야 한다고, 지난 시절 사람들은 그렇게 당신을 훈계하고 또 조롱했습니다. 높으신 나리들 영접하느라 해경 등이 실종자 수색에 집중하지 못했던 상황을 돌이켜보면, 국민의 생명을 구하지도 못하는 대통령의 권위 따위 진작 집어던지는 게 옳았습니다. 힘 있는 자에게 호통치고 국민 앞에 무릎 꿇던 당신의 모습이 그래서 그립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검찰, 언론, 사학 등 한국의 주요 권력집단에 대한 개혁은 어정쩡한 타협으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재벌은 손대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특정 재벌에 휘둘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현실론의 관점에서 이해할 만한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미FTA의 경우 단순히 경제문제를 넘어선 안보동맹으로서의 한미관계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부시 행정부의 전략기동군화 계획은 한반도가 다시 강대국의 전쟁놀이터로 급변할 개연성을 열어 놓았지요. 한미FTA는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만, 과연 이것이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또는 유일한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게다가 FTA에 따른 세계화와 무한경쟁의 도입은 필연적으로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어서 양극화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맥 대신 시스템에 의한 국가운영 시도했던 당신

그럼에도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는 비록 판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당신이 가졌던 최소한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익을 위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 많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으려고 했었지요. 인맥 대신 시스템에 의한 국가운영을 시도했던 것도 당신의 그런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당신이 떠난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야만적인 파괴였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후임자가 남긴 대통령 기록물의 차이가 단적으로 이 파괴의 흔적을 말해줍니다. 국가재난 상황을 총괄해서 대처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무력화된 결과가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국민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며 NSC가 컨트롤타워가 돼야 한다는 당신의 목소리를 왜 후임자들은 듣지 않은 걸까요. 소방공무원을 늘리려던 당신의 발목까지 잡던 이들이 수많은 생명들을 수장시키고 나서야 국가안전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당신에게 패기만만하게 대들던 검사들은 부정과 비리와 부당한 권력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직접 조사했던 검사는 지금 청와대 비서관이 되어 권세와 영달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던 당신의 불길한 예감은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듯 당신이 마지막으로 품었던 새로운 희망의 씨앗 또한 언젠가는 현실의 꽃으로 찬란하게 피어나리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으라는 당신의 외침을 가슴 속에 간직하겠습니다.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를 청산하자던 당신의 뜻을 되새기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날들, 당신의 그 환한 미소와 뜨거웠던 눈물까지 모두 기억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노무현의 국민으로 살았던 지난 5년을 잊지 않으렵니다.

2014년의 대한민국, 시리도록 푸른 5월의 하늘만큼이나 당신이 그립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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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노무현, #세월호, #노무현 5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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