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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의 서거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의 서거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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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결혼한 이소선은 모든 서러움 속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서 어떠한 역경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이를 극복하면서 살아가리라 굳게 다짐했다. 고난보다는 행복이 있을 것을 빌며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고 싶지가 않았다.

큰집에서는 피복가게를 열어서 제품을 내다팔았고 남편은 집에서 옷을 만들었다. 생활은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갈 수가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바람보다는 작은 꿈을 키워나가며 어느 정도 살아가는 즐거움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즐거움 속에 고난의 불씨가 자라고 있을 줄이야…….

남편은 제법 옷이 잘 팔리자 여기저기에 일을 능력 이상으로 크게 벌여놓더니 급기야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점점 빚더미가 쌓여 사업이 어려워지는가 싶더니 큰집까지 넘보며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남편의 행동을 보면서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6·25 전쟁 직전 무렵이었다. 고향인 대구에서 도망가다시피해서 부산으로 갔다. 태일이가 겨우 3살이었고 뱃속에는 둘째가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 따라 부산으로 도망 온 소선... 시장바닥에서 지내기도

남편은 억지로 소선을 데리고 부산까지 왔으나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 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들끓는 자갈치 시장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발길 내키는 대로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자갈치 시장은 행상백화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온갖 종류의 장사꾼들이 복작거리고 있었다.

막상 자갈치 시장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남편과 이소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 한 푼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막막했다. 시장 바닥은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이들은 그저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거렁뱅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은 좌판과 행인들 틈바구니를 한참이나 쏘다니더니 이소선에게 어느 길모퉁이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툭 던지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소선은 3살짜리 태일이를 업고 남산만한 배를 한 채 자갈치 시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칭얼거리는 태일이도 그렇지만 잔뜩 부른 배를 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바닥에 멀거니 서 있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한 시간,두 시간…….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이 사라진 골목을 눈이 빠지도록 지켜보았지만 결국 그날 밤을 그런 몸으로 길바닥에서 꼬박 새웠다. 아침이 뿌옇게 밝아오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었다.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가진 돈이라고 해봐야 변변치 못했는데 그나마도 남편의 주머니에 있었다. 배고픔에 지쳐 울기에도 지쳐버린 태일이를 끌어안고 한데서 날밤을 새웠으니 …….

다음날 정오쯤이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골목에 지쳐 쓰러져 있는데 남편이 나타났다. 이소선은 남편이 이끄는 대로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태일이에게 밥을 떠먹여 주었다. 아이는 콧물이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밥숟갈을 놀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고 그 골목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또 다시 자취를 감췄다. 이소선은 남편이 기다리라고 해서 골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태일이를 업었다가 걷게도 하면서 골목 안을 맴돌았다. 시장 바닥에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열흘이 넘도록 남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골목 안에서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싸움박질 같기만 하던 시장의 하루가 끝난 뒤 밤하늘에 별이 총총이 떴다. 잠들었던 태일이가 눈을 뜨더니 이소선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이소선은 태일이를 달래면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장바닥은 고요했다.

가게는 전부 문을 닫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근방을 둘러보아도 물을 먹을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바닷가까지 태일이를 들쳐 업고 갔다. 이소선은 신발을 벗어 깨끗하게 씻었다. 신발에 물을 떠서 태일이 입에 갖다 대주었다. 태일이는 물을 조금 마시는 듯하더니 이내 손을 내 저었다.

"엄마는 나빠, 물 달라고 하는데 와 이리 맛이 없는 물을 주노."

이소선은 아이한테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눈물도 메말라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남들 다 잠든 이 밤에 어디서 물을 구한단 말인가. 이소선은 신발을 손에 들고 넋이 빠진 듯 졸음을 가득 베어 문 태일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태일이는 그래도 신발에 담긴 물을 몇 모금 더 마시더니 잠에 빠져들었다.

이런 생활을 열흘쯤 하다가 남편이 자갈치 시장 피복상에 취직을 했다. 다행히 피복상 주인은 마음씨가 좋은 할아버지였다. 장사는 대충 오후 10시쯤 해서 끝났다. 피복상 할아버지의 배려로 장사가 끝나면 가게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비록 마룻바닥이었지만 궁전보다 훨씬 좋았다. 이제는 하염없이 길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한뎃잠이 아니라 방에서 잘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만족스러워했는지 모른다.

새벽 6시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이소선 모자는 할 수 없이 낮에는 골목길을 배회하면서 지내야 했다. 그래도 생활의 근거지가 정해진 이상 이소선도 차차 좀 돌아 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이소선은 몇 달 동안이나 길바닥 먼지구덩이에서 뒹굴고,때로는 비까지 그대로 맞으며 살다보니 머리가 가려워서 못살 지경이었다. 이소선은 남편에게 참빗 하나 사달라고 했다. 그래서 참빗은 마련했으나 머리를 빗을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시장바닥에서 머리를 빗자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일이 손을 잡고 사람들이 뜸한 곳을 찾아 나섰다. 사람들이 안 다니는 곳을 찾기 위해 시장을 벗어나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무작정 길을 따라가면 사람이 없는 곳이 나오겠거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시장을 지나 도심을 벗어나니 한적한 고개가 나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그 고개에서 몇 달 동안 빗질 한번 못한 머리에 손을 댔다. 머리에 손을 얹고 빗질을 하니 이가 주루룩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머리를 빗고 오던 길로 돌아왔다. 그날 밤 11시 59분쯤 그 피복가게에서 둘째를 낳았다. 1950년 6월 15일이었다. 아기를 낳긴 했지만 준비해 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웃집에 있는 사람이 쌀밥에 미역국을 끓여왔다.

시장에서 둘째 낳았지만 기저귀 말릴 곳 없어...

뱃속에 있던 아기를 낳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또 어디로 몸을 내맡겨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걱정부터 앞섰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에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앞으로 일 주일간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자기 가게에서 아기가 탄생했으니 어렵더라도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피복집 주인 할아버지는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치고, 양심적이면서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한 일 주일쯤 할아버지 덕분에 몸조리하고 나니 그런대로 살 것만 같았다.

아기를 낳아 기르니 기저귀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런데 기저귀를 빨아서 널어둘 만한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저귀를 손에 들고 태일이와 함께 시장바닥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말렸다. 어느 날 태일이가 엄마를 보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엄마, 아기 바닷물에 던져버려, 그러면 엄마 고생 안할 거 아니가."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태일이 말을 듣는 순간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세 살밖에 안된 어린 자식의 눈에도 어미 꼴이 너무 고생스럽게 보였나 보다. 어미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아기를 물에 던져버리면 하는 것으로 나타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태일아, 그러면 안 된다. 아기도 살라고 나왔는데 물에 던지면 되나 뒤에는 그런 말 하지 마레이."

이소선은 쓰린 가슴을 달래며 조용히 타일렀다. 태일이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걸며 맹세했다. 그러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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