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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노팅힐 게이트 역에 들어서는 한 여자를 무려 다섯 대의 CCTV가 동시에 주시하고 있다.
 런던 노팅힐 게이트 역에 들어서는 한 여자를 무려 다섯 대의 CCTV가 동시에 주시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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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주시하는 CCTV 다섯 대

사진으로 담은 실제 상황이다. 커피를 든 그녀가 노팅힐 게이트(Notting Hill Gate) 역에 들어선다. 노팅힐 게이트 역은 이용객 많기로 소문난 런던 시내(city) 지하철 역 가운데 하나다. 그는 거미줄보다 촘촘하게 펼쳐진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행선지를 재차 확인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 한 둘이 아니다. 그녀가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하는 동선(動線)의 반경은 약 2미터. 불과 2미터 반경 안에서 그녀를 주시하는 시선은 무려 다섯. CCTV(폐쇄회로TV) 다섯 대가 앞뒤 좌우로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았다.

런던에 와서 제일 찝찝한 게 있다면 바로 CCTV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 곳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CCTV가 날 노려보고 있다.

집을 나서면 가로등 아래 설치된 CCTV가 나의 위아래를 훑는다. 길을 건너려 횡단보도에 서면 맞은편에서 CCTV가 시비 걸듯 째려본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구석구석 설치된 CCTV가 혹시 도둑질은 하지 않나 눈을 떼지 않는다. 시내를 나가려고 지하철이라도 탈라치면 사방팔방에서 CCTV의 가시 눈길이 쏟아진다. 움직이려면 무조건 CCTV의 밀착 감시를 감수해야 한다.

영국의 NGO '빅브라더워치(Big Brother Watch)'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현재 런던에 사는 사람이 하루에 CCTV에 찍히는 횟수는 평균 약 300회. 한 사람이, 한 시간당 CCTV에 최소한 13회 찍힌다는 얘기다. 이를 분으로 환산하면 약 5분에 한 번 꼴로 CCTV에 찍히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출신 작가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출간한 소설 <1984년>이 21세기에 현실이 되어버렸다. 소설 속에서 '빅 브라더'라 불리는 이들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과 사회를 주도면밀하게 감시한다.

21세기 현실에선 국가권력과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세력, 도시의 안전을 희구하는 이들이 동시에 CCTV를 활용한다. 안전과 보호라는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있지만 CCTV의 민낯은 감시일 뿐. 사회적 힘의 기울기를 타산하면 누가 감시하고 있고, 누가 감시받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그래서 감시하는 세력을 21세기에도 소설에서처럼 여전히 '빅 브라더(big brother)'라고 부른다.

영국보안산업위원회(BSIA)는 2013년 7월 현재 영국에 약 590만대의 CCTV가 설치돼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사생활보호 단체는 "영국 정부가 설치한 CCTV 약 185만대, 기업이나 개인이 설치한 사설 CCTV 약 420만대 등 영국에 약 605만대의 CCTV가 설치돼 있다"며 "영국에는 최소한 약 600만 명의 스파이(spy)가 항상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600만대 미만이든 600만대 이상이든 영국에 CCTV가 많이 설치돼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언론들과 경찰 관계자들도 CCTV 설치 숫자에 대해서 약 600만대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많은 CCTV를 설치하는 까닭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서다. 이 같은 논리는 2005년 런던 폭탄테러사건 이후 CCTV 설치 확대를 주장하는 세력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CCTV 범죄 감소 효과 '있다, 없다'

영국의 한 단체가 "빅브라더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며 자동차 번호 식별기와 스파이 카메라(CCTV)가 설치되어 있는 위치를 공개하는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영국의 한 단체가 "빅브라더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며 자동차 번호 식별기와 스파이 카메라(CCTV)가 설치되어 있는 위치를 공개하는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Big brother wa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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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수한 CCTV 설치는 영국에, 런던에 안전을 가져다주었을까. 여러 가지 지표 중에서 범죄율(crime rate)의 증감으로 효과를 따져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겠다.

영국 경찰대학(College of Policing)은 올해 '범죄에서 CCTV의 효과'라는 제목의 자료를 냈다. 이 자료에 따르면 "CCTV는 주차장에서 일어난 범죄의 51%, 시내 중심가에서 발생한 범죄의 10%, 지하철에서 발생한 범죄의 23%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빅브라더워치 등 NGO들은 "지난 4년 동안 CCTV 설치 및 운용비용으로 515억 파운드(한국 돈으로 약 87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은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았다"며 "지난 4년 동안 CCTV 설치 및 운용비용으로 쓴 515억 파운드면 거리를 순찰하는 영국 경찰 4121명의 비용과 맞먹는 것"이라고 CCTV의 범죄율 감소 효과를 반문했다.  

영국 경찰관계자 역시 "런던에만 50만대의 CCTV가 설치돼 있지만 CCTV에 의존해 범죄를 해결한 것은 3%에 불과하다"고 고백할 정도다. 앞서 인용한 경찰대학 자료에도 "런던을 국한해서 봤을 때 주거지역에서 CCTV의 범죄 감소 효과는 미미했다"고 적고 있다. 

영국의 우스갯소리 중에 "흰색 커튼 뒤 할머니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영국은 집집마다 흰색 커튼이 쳐져있다. '흰색 커튼 뒤 할머니'는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항시 동네를 내다본다. 오늘은 어떤 아이가 짓궂게 장난을 치는지, 어떤 차가 이웃의 차를 받고 뺑소니쳤는지 흰색 커튼 뒤에서 다 보고 있는 할머니는, 말하자면 '동네 보안관'이다.

전 세계 CCTV의 약 20%가 설치되어있다는 런던. 2013년 기준으로 영국엔 14명당 1대 꼴로 CCTV가 돌아가고 있다. CCTV를 백날 돌린다고 범죄가 사라지지 않았다. CCTV로 범인 한 명 잡았다고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모두 제거된 것도 아니다.

마을을 다시 주목하는 이유

영국의 거의 모든 주택엔 흰색 커튼이 있다. 우스갯 말로 "흰색 커튼 뒤 할머니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거의 모든 주택엔 흰색 커튼이 있다. 우스갯 말로 "흰색 커튼 뒤 할머니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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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로 대변되는 빅브라더와 '동네 보안관 할머니' 중 누가 감시가 아닌 보호를 해줄 수 있을까. CCTV와 할머니 중 누가 나를 살갑게 지켜줄 수 있을까.

감시하는 자들은 늘 안전을 미끼로 던진다. 하나의 안전장치가 마련됐다고 불안이 다 해소되지 않는다. 아파트 평수 늘려가는 것을 행복의 기준점으로 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4평 살면 32평이 부럽고, 32평 살면 72평이 행복의 바로미터 평수가 된다. 마침내 72평에 살게 되면 증식하는 욕망은 멈춰질까? 천만에!

욕망이 증식하듯 불안도 자기증식한다. 문제는 욕망도, 불안도 파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보다 항상 필요성을 부풀려 맛을 들인 다음 습관처럼 복용하게 만든다. '안전'이라는 상품은 그런 점에서 매우 팔기 쉬운 상품이다. 범죄 뉴스 한 꼭지면 '세상은 무서운 곳'이라며 수요자가 먼저 다가온다.

런던 시민은 '안전하기 위해서' 5분에 한번 꼴로 CCTV에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범죄의 위협에서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럼 1분 단위 아니 10초 단위로 사생활을 CCTV에 내보이면 '안전'해질 수 있을까. 끝도 없을 얘기다.

그래서 안전은 CCTV 파는 세력에게 살 것이 아니다. 안전은 '흰색 커튼 뒤 할머니'와 함께 마시는 마을 샘물 같은 것이다. 정겨운 공동체를 이루면 자연스럽게 함께 얻어가는 행복 중 하나다. 한국에서 '마을'을 다시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 아닌가.


태그:#런던, #노팅힐, #CCTV, #테러, #빅브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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