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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민자들과 내국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영국. 그러나 영국 정부는 어려운 경제상황의 해결책으로 공격적인 이민자 정책을 앞세우고 있다.
 다양한 이민자들과 내국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영국. 그러나 영국 정부는 어려운 경제상황의 해결책으로 공격적인 이민자 정책을 앞세우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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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빼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인천공항에서 영국 런던 히드로공항까지 비행시간 열두 시간. 두 종류의 신문을 읽고,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두 번의 기내식을 먹었다. 열두 시간이 마치 두세 시간처럼 느껴졌다.

입국심사원은 여성이었다. 얼굴엔 생글생글 웃음기가 떠나질 않았지만 질문은 갈수록 까칠해졌다. "혼자 온 건가, 잉글랜드에만 머물 예정인가, 런던에 숙소는 있나, 직업은 무엇인가, 신용카드 한도는 얼마인가, 현금은 얼마나 가져왔나..." 등등.

급기야 그는 다른 직원과 함께 내 짐을 마구 풀어헤치더니 구석구석 뒤졌다. 심지어 지갑 속 현금까지 세었다. 이쯤 되니 비행기 안에서 즐거웠던 12시간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해갔다.

"보스랑 상의를 하고 오겠다"는 그를 입국 심사 대기석에 앉아 기다렸다. '테러를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싶어 기분이 매우 씁쓸해졌다. 무엇보다 '여기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초조해졌다.

내 여권을 들고 오는 그녀 걸음이 경쾌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원래 우리가 의심이 많거든. 네가 잉글랜드는 물론 아일랜드도 간다고 했는데 비행기 표도 예약이 안 되어 있고 해서 의심했어. 미안해, 우리도 네가 '수상한 사람(stranger)'이 아니라는 것 안다고."

그가 말하는 '수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뒷날 한인신문을 보고 알았다. 영국 한인신문인 온라인 <코리아위클리>는 '도움 안 되는 이민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톱뉴스로 실었다. 기사는 "이민 정착자가 영국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영국인은 6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전했다.

영국인 2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영국인 응답자의 60%는 이민자들이 영국에 이익보다는 불익을 가져온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사는 보수당 부의장을 지낸 아쉬크로프트 경(Lord Ashcroft)이 실시했다.

'협박'이라는 지적을 받은 영국 정부의 이민자 광고. 화물차량을 개조해 "영국에 불법 체류하고 있나?"라는 질문 아래 수갑을 내보이며 "본국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체포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협박'이라는 지적을 받은 영국 정부의 이민자 광고. 화물차량을 개조해 "영국에 불법 체류하고 있나?"라는 질문 아래 수갑을 내보이며 "본국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체포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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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입국 심사 후 여권에 “일하지 말 것이며 영국의 공익 혜택(무상의료나 교육 등 무상복지)에 의존하지도 마라”는 문구가 새긴 도장을 찍었다.
 까다로운 입국 심사 후 여권에 “일하지 말 것이며 영국의 공익 혜택(무상의료나 교육 등 무상복지)에 의존하지도 마라”는 문구가 새긴 도장을 찍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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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또 최근 영국 정부가 런던 등 대도시에서 벌이는 불법 이민자 추방 캠페인에 대해 무려 79%의 응답자가 '잘한 일'이라며 지지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덧붙였다. 이 이민자 추방 캠페인은 화물차량을 개조해 수갑을 그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한다 Go home or face arrest'는 협박성 문구를 적어 논란을 야기했었다.

입국 심사원이 말한 '수상한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아닌 불법 이민자를 뜻한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 챘다. 그가 내 여권에 "일하지 말 것이며 영국의 공익 혜택(무상의료나 교육 등 무상복지)에 의존하지도 마라"는 내용이 적힌 도장을 찍은 까닭도 이해가 됐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이민자가 아닌 장기체류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영제국은 이민자는 물론 장기체류자에게조차 까칠해진 것일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까칠해진 영국의 이민자 정책엔 어려운 살림살이가 숨어있다.

영국 통계청(ONS)이 조사한 2013년 7월 현재 영국의 실업률은 7.8%. 2012년 영국 실업률이 8.4%였으니 하향세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영국의 만 16세부터 24세까지 청년실업률은 8월 14일 현재 무려 21.4%에 이른다. 매우 높은 수치다. 좀처럼 낮아질 줄 모르는 높은 청년실업률은 지난 2011년 런던 폭동의 큰 원인이었다.

유럽 경제위기 속에서 영국은 그나마 잘 헤쳐 나가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경제상황은 불안정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경제의 불안정은 불안한 일자리를 낳는다.

영국 통계청은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영국의 새 일자리 310만 개 가운데 74%인 230만 개 일자리를 외국 이주민이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인이 새로 얻은 일자리는 79만4천 개였다.

2010년 집권한 보수당 연립정권이 공격적인 이민자 정책을 펼치는 까닭은 분명하다. 이민자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내국인이 누려야 할 복지혜택을 이민자들이 더 많이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캐머런 총리는 오는 2015년까지 유럽연합 제외 국가(non-EU countries)에서 온 이민자 수를 10만 명 미만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불법 이민자들을 향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할 것"이라는 협박성 홍보를 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인도계와 서남아시아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런던 북부지역.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스치고 있다.
 인도계와 서남아시아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런던 북부지역.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스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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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당 연립정권은 "2012년 영국인 58만9천 명이 새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것은 신규 취업인구의 67%"라며 "이는 1990년대 이후 처음으로 영국인이 일자리 경쟁에서 외국 이주민을 제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내국인을 보호하기 위한 이주민 억제 대책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공격적인 영국 정부의 이주민 정책 때문일까.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56만6000명이었던 이주민은 2012년 12월 말 현재 49만7000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 많은 이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타자를 배제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셈법이 얼마나 큰 효력을 발휘하는지 모르겠다. 또 배제가 선물하는 실효의 유통기한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조차 힘들다. 그저 궁금한 것은 이주민들이 앉았던 억센 노동의 자리에 영국인들이 지금 앉아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도에서 온 M씨는 런던 북부의 한 대형마켓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다. 그녀가 받는 시간당 급여는 5파운드 70펜스, 한국 돈으로 약 9700원이다. 영국 정부가 정한 최저 시급은 6파운드 31펜스, 한국 돈으로 약 1만740원이다. 이 마켓에서 일하는 영국 내국인은 채 다섯 명이 되지 않는다.


태그:#런던, #시급제, #이주민, #입국 심사, #청년 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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