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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피해를 막기위해 고구마밭에 설치한 철망울타리, 설치비가 고구마 산 돈보다 많이 들었다.
▲ 철망 울타리 멧돼지 피해를 막기위해 고구마밭에 설치한 철망울타리, 설치비가 고구마 산 돈보다 많이 들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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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로 우거진 텃밭에 고구마를 심기위해 쇠스랑으로 며칠 동안 파서 두둑을 만들고 고구마 순을 사다 심었다. 며칠 후 텃밭에 가보니, 싹이 말라죽어 빈자리에 다시 고구마 순을 심었다. 새파란 싹이 자라면서 쭉쭉 뻗어가는 고구마 넝쿨로 채워지는 고구마 밭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씨알은커녕, 뿌리들도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고구마 밭에 멧돼지가 다녀갔다. 멧돼지의 피해는 고라니가 연한 잎만 골라 뜯어먹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멧돼지는 고구마 뿌리까지 파 버리기 때문에 피해 직후 다시 심어 놓지 않으면 말라 죽고 만다. 

지난 3년 동안 매년 멧돼지에게 고구마 밭을 털렸다. 잎과 줄기가 싱싱하게 자라도록 쏟아 부었던 그 험한 고생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1~2년 고구마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면 이즈음에서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런 처사일 것이다. 작년에 우리와 같이 멧돼지에게 당한 앞집 박씨 아저씨는 고구마 농사를 포기한 모양이다. 올해는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다.

당뇨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해야하는 나에겐 고구마가 꼭 필요한 식량이다. 귀촌하고 난 뒤부터는 먹거리를 자급자족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기에 고구마 농사를 쉽게 포기 할 수 없다. 고구마를 심고 곧바로 전기충격울타리를 설치할 생각이었지만, 이웃들이 전기울타리 설치를 말리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전기울타리는 잡초가 자라 전기선에 닿으면 누전이 되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자주 전기선 주변의 잡초를 제거해줘야 하며 전기선이 파손되지 않게 제거하는 작업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다.

늦게 심은데다 초보 농부가 심은 고구마라 그런지 피해를 면한 고구마도 잘 자라지 못했다.
▲ 멧돼지 패해를 면한 고구마 순 늦게 심은데다 초보 농부가 심은 고구마라 그런지 피해를 면한 고구마도 잘 자라지 못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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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심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시랑헌 주변 환경정리를 위한 잡다한 일들을 바쁘게 하다 보니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아침에 먹을 우뭇가사리에 넣을 오이를 따기 위해 텃밭에 갔다가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했다. 고구마 밭 1/3정도를 뒤집어 망쳐놨지만, 원하던 고구마를 얻지 못해서인지 나머지는 무사했다. 

너무 화가 난 나와 집사람은 '전기'가 됐던 '철망'이 됐던 당장 울타리를 만들 요량으로 남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서 만난 이장은 쇠기둥에 철망을 두른 울타리를 권했다. 자재비가 만만하지 않을 터이니 쇠기둥은 고물상에서 구하도록 조언하고, 철망은 생산 공장에서 살 수 있도록 공장 위치를 알려줬다.

남원 고물상에서 쇠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할 철근을 골랐다. 300㎏이다. 17만 원을 계산하고, 철망공장에서 철망 60m 구입하고 8만 원을 지불했으니 기본 자재비만 계산해도 25만 원이다. 이 돈이면 고구마 12상자는 족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구마 밭에서는 12상자 고구마를 생산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자 마음이 혼란스럽다. 올해 한번만 울타리를 설치를 해놓으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철망 울타리를 설치해야할 동기도 충분하고 방법도 정해졌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10cm L자형 철 지주를 2m 간격으로 30개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고, 쇠기둥에 철근을 3단으로 용접하여 붙이는 작업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들 억지 같아 우울해지고 심난하다. 귀갓길 트럭에서 짓는 한숨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집사람이 '김 사장' 댁에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한다.

김 사장 내외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5년 전에 귀농한 가족이다. 나이는 우리보다 1~2년 어리지만 귀농 생활 선배다. 검도를 몇 년째 하는 유단자 부부인지라 근력이 좋고 힘을 쓰는 요령도 정확하다. 서로 의지하는 가까운 이웃이다. 다용도실 공사, 덱 설치, 마당에 잔디를 깔 때도 도움을 받았다. 김 사장도 그렇지만 특히 부인은 매우 활동적이며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다. 나이는 60대에 가깝지만 신체나이는 20대를 유지한단다.

2m가 넘는 쇠기둥이 검도 유단자 김 사장이 내려치는 해머에 맥을 못 쓰고 땅속으로 푹푹 박힌다. 어려워 보이고 심난했던 지주 세우는 일이 예상보다 쉽고 빠르게 끝났다. 다음 단계는 쇠기둥에 철근을 3줄로 붙이는 용접 일이다. 내 용접마스크는 평상시에는 일반 선글라스 같은 안경이지만, 눈부신 불꽃이 튀면 순식간에 불투명에 가까운 용접안경으로 바뀌는 감지기가 장착된 최신형이다. 용접일은 조금 경험도 있고 용접마스크도 자랑할 겸 내가 용접봉을 잡았고 김 사장은 보조가 되었다.

단단한 쇠기둥과 무른 철근은 녹는 온도가 서로 달라 쉽게 용접되지 않고 자꾸 떨어진다. 작업시간이 지체되고 용접된 부분의 강도도 시원치 않다. 용접기의 세기를 높였더니 용접기가 타버렸는지 전원을 연결하면 누전차단기가 떨어져 버린다.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난감한 처지에 주저앉은 나에게 김 사장이 무른 철사(반생이)로 묶는 방법을 권한다. 철사와 꼬챙이를 사오고 펜치를 가져왔다. 다시 작업반장은 김 사장이 됐다.  

멧돼지가 파헤쳐 빈 곳은 김 사장 댁 고구마 밭에서 솎아온 새 순으로 집사람과 김 사장 부인이 메웠다. 쇠기둥과 철근은 다시 단단하게 동여매지고 작업에 속도가 붙었지만 시간은 8시가 지났고 날이 어두워졌다. 집사람과 김 사장 부인의 작업도 끝났다. 김 사장의 자상한 설명 덕분에 철사로 동여매는 작업은 이제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심한 허기가 밀려온다. 집사람은 일을 하느라 저녁식사를 준비하지 못했다.

통닭은 나에겐 삼가야할 음식이다. 허기지고 준비한 저녁이 없다. 오늘 한 일은 힘들고 어려웠으니 저녁 한 끼는 너그러워지자고 자신과 타협한다. 시랑헌에 올라와 얼굴과 손을 씻고 야외 탁자에 앉아 김 사장이 피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면서 담배 피우던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노라니 집사람이 주문한 통닭이 도착한다.

말라죽은 자리에 다시 고구마순을 심고 뿌리가 내릴 때까지 매일 오후에는 물을 준다.
▲ 다시 심은 고구마 순 말라죽은 자리에 다시 고구마순을 심고 뿌리가 내릴 때까지 매일 오후에는 물을 준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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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김 사장에게 배운 기술로 쇠기둥과 철근을 엮어 매고, 철망을 치고 나면 철망울타리의 전모가 들어날 것이다. 그동안 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머리를 눌러왔던 멧돼지 공격에 대한 나의 답장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최후통첩이 되어 멧돼지가 더 이상 우리 텃밭에 나타나지 않기를 빈다.

화려한 불꽃에 자신의 전부를 살라버린 순수무구한 장작의 재 같이 쓰고 남은 에너지를 말끔하게 태워버리고 텅 빈 몸에 다시 새로운 에너지의 충전을 위한 식탁의 자리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낸 김 사장 내외가 달리 보인다.

시골의 품앗이는 인정이다.


태그:#귀농, #귀촌, #멧돼지,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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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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