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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레의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87)씨가 1947년 처음 작곡할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겨레의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87)씨가 1947년 처음 작곡할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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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동안이나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니…. 부끄러운 일이에요. 이제 그만 좀 불렸으면 좋겠어요."

94주년 3·1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 말, 굴곡의 한국현대사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작곡가인 안병원씨가 털어놓은 말이다. 올해 87세인 안병원씨는 '민족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했지만, 노래의 유명세 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음악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한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면 열 중 아홉은 고개를 흔든다. "'안병원'이라는 분인데요, 동요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도 작곡한 분입니다"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외국 동요 '힌눈사이로 썰매를 타고…' 우리말 번역자이기도 한데요"라고 말하면, "어, 그래요?"라는 반응이 나온다.

안병원씨는 혼런스러웠던 해방공간에서 대학 2학년이었던 약관 22세에 겨레 동요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했다. 작사자는 바로 그의 아버지 안석주(1950년 2월 작고)였다. 노래는 남고 그 노래를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기억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작사자 안석주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4개월 전인 1950년 2월에 작고했고, 작곡자 안병원씨는 1974년 어머니와 손아래 동생이 살고 있던 캐나다로 홀연히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다.

청량한 초원의 빛이 대지를 어루만지는 2월 말, 미국 플로리다 목초지에서 열린 기독교 건강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노선영(77)씨와 함께 올랜도에 온 안병원씨를 만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 얽힌 삶의 역정을 들었다. 안씨는 긴 거리 보행에서나 사용하는 지팡이를 한 손에 들었지만, 90세를 앞둔 노인 답지 않게 목소리는 카랑카랑 했고 눈매와 혈색은 젊은이 못지 않게 밝고 맑았다.

다만 살아온 날 수 만큼이나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 탓인지 종종 중요한 사건의 앞뒤 정황을 혼동하는 바람에 평생의 동반자인 부인 노선영(77)씨가 인터뷰를 도왔다. 또 일부 연대기 등은 안씨가 보내온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안씨의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
 안씨의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
ⓒ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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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당시 노래의 제목은 '독립의 노래'였죠? '우리의 소원은 독립' 작곡 당시의 정황은 어땠나요? 역사에 기록될 곡의 탄생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처음 이 노래를 작곡하게 된 것은 순전히 친구 때문이었어. 중앙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 담당 배준호가 어느날 나를 찾아온 거야. 그는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에 색다른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없냐'고 물어왔어. 이리저리 의논하던 끝에 우리는 '독립의 날' 노래극을 만들어보자는데 합의를 보았지."

- 처음부터 작곡은 '내가 해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나요?
"아마도 친구는 처음부터 내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왔던 듯해. 음대생이니 작곡은 내가 할 터이고, 작사는 언론인인 아버지에게 부탁할 심산이었던 것 같았어. 당시 방송국 사정으로는 대본 원고료, 작사료, 작곡료 등을 지불할 형편이 못 되었고, 반주 악기도 피아노 밖에는 없었다고. 더구나 나는 그 당시 이미 어린이 합창단인 '봉선화 동요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지."

-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버님은 엄격한 분이셨어. 특히 9남매의 장남인 내가 공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늘상 쏘다니는 걸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셨거든. 찾아간 그날도 신문일로 바쁘신 아버님이 '이놈이 또 무슨 일을 벌이려나' 하는 귀찮은 눈빛을 보이셨어. 우리의 뜻을 상세히 말씀드렸더니 한참 생각하시더니 '써주겠다'고 하시는 거야. 기특하다고 여기셨던 게지."

결국 안병원과 배준호는 아버지 안석주로부터 25분짜리 노래극 원고를 받아냈다. 5곡이나 되던 노래 모두 안병원이 작곡을 맡았고, 출연진은 안병원이 만들어 지휘하던 '봉선화 동요회'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배준호가 막연하게 내놓은 '노래극'은 안병원 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한 잔치가 된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 당시의 안병원씨. 약관 22세 서울대 음대생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 당시의 안병원씨. 약관 22세 서울대 음대생이었다.
ⓒ 안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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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를 받은 후 작곡 구상은 주로 어디에서 했습니까.

"당시 친구 권길상의 아버님이 목사님으로 있던 명륜중앙교회에서 밤낮으로 살다시피 했어. 풍금을 두들기다 말고 한숨을 짓고 교회 의자에 드러누워 그대로 쓰러져 밤을 새우기도 했지. 그렇게 수주 동안을 뒹굴며 고민하던 끝에 5곡의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어. 그 가운데 하나인 '독립의 노래'는 일주일 동안의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네. 당초 '독립의 노래'용으로 3곡을 작곡했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겠더라고."

- 고민해서 세 곡을 만들었는데, 그중 한곡을 어떻게 낙점하게 되었나요.
"다시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그 가운데 유난히 마음이 간 하나를 짚으며 '이게 어떨지 모르겠다' 넌지시 내밀었더니 '야, 그거 참 좋다, 그거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 부전자전 이심전심이었던 거야."

안병원의 아버지 안석주는 일제말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학예부장 등으로 일한 언론인이자 화가다. 당시 그의 신문소설 삽화와 한컷 짜리 만평은 장안의 화제였으며, 웬만한 논설 집필자보다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하는 '독립의 노래'가 안병원-안석주 부자에 의해 탄생했다. 이 노래는 삼일절 방송을 타기 전인 2월 28일 오후 2시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연 삼일절 기념 아동음악회에서 '봉선화 동요회'가 먼저 합창으로 불렀다.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오후 5시 30분 방송을 타고 전국 곳곳에 퍼진 후에 나타난 반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당시의 반응을 회고하실 수 있으신지. 겨레의 신데렐라가 된 그날의 광경을.
"(천장을 쳐다보며) 허헛참,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었지. 9남매 중 장남으로 늘 꾸중만 듣고 자란 터에 아버님으로부터 오랫만에 칭찬이란 것을 듣었다고. '야 너 참 잘했다' 그러는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말야, 전국의 지방 방송국들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학교들로부터도 악보를 보내달라는 성화가 빗발치는 거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어."

- 1947년 2월이면 이미 해방이 된 지 1년 6개월여가 지난 때였는데요. 왜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는 노랫말을 짓게 되었나요.
"당시 웬만큼 뜻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진정한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버지 역시 우리 민족이 진정한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봐. 당시 미군정이 계속되고 있었고, 정부 수립 문제로 좌우가 대립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잖아."

잠시 덧붙이면, 안병원 부자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을 만들고 있던 당시 한반도는 단독정부냐 통일정부냐를 놓고 정치세력들 간에 밀고 당기는 쟁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독립의 노래가' 전국 방송망을 타던 그날 제주도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좌익계 인사들을 포함한 제주 주민들이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시발이 되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인 제주 4·3사태가 발생하여 2만5천여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다. 우연 치고는 가슴이 아픈 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뀐 사연

 1954년 어린이음악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해 48개주를 순회하던 당시, 이들의 활동을 톱기사로 다룬 미국의 일간지
 1954년 어린이음악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해 48개주를 순회하던 당시, 이들의 활동을 톱기사로 다룬 미국의 일간지
ⓒ 샌프란시스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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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뀌게 된 계기가 궁금하군요.

"독립의 노래가 만들어졌던 다음해인 1948면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부터 삼팔선이 막혀버렸지. 어느날 문교부로부터 '이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고쳐 부르는 게 좋겠다'는 제안이 왔어. 1950년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처음 실리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아예 단골로 교과서에 실리게 된 거야."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안병원은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에서 어린이 음악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고, YMCA어린이합창단 지휘, 경기여중고, 경복중, 용산중고  교사, 숙명여대 강사, 각종 음악인 단체장 등을 지내며 캐나다 이민 전까지 엄청나게 바쁜 세월을 보냈다.

전쟁이 막 끝난 1954년에는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3개월 동안 미국 48개주를 순회했는데, 가는 곳마다 미국 언론과 미국인들로부터 열띤 환영과 갈채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순회공연은 많은 신문에 보도됐고 미 전역 97개 TV에서 방송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또 공연 도중 뉴욕 유라니아(URANIA) 레코드사가 어린이 합창단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경무대와 국회의사당을 방문하고 국무위원 초청 파티 등에 참석했다. 또 이들을 위한 귀국환영대회가 시청 앞에서 열렸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동요가 아닌 '가곡'으로 분류하자는 주장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내가 반대했어. 나는 처음부터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즐겨 부를 수 있는 동요를 작곡한 것이었어. 나는 어렸을 적부터 동요인생을 살고 싶었다고."

- '동요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계기는?
"동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지. 어느날 신문사 학예부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극장 티켓을 얻어 오셨는데, 빈 소년 합창단 순회공연 영화 티켓이었어. 당시 부민관(전 국회의사당)에서 상영된 그 영화가 준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해. 그날 어린 합창단원들이 내는 소리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나도 후에 어린이 합창단을 조직하여 세계 일주 음악 공연을 하고야 말겠다'는 뜻을 세웠다네.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음악사절단을 이끌고 미국 48개주를 순회해 내 꿈을 어느정도는 달성했다고 봐."

안병원은 일찌감치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줬고, 오로지 동요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작곡한 동요는 '우리의 소원', '구슬비', '가을 바람', '학교 앞 문구점', '나 혼자서', '푸른 바람' 등을 포함해 300곡이 넘는다. 번안 동요까지 합치면 족히 500곡이 되고도 남는다. '흰눈 사이로', '소나무여, 소나무여' '노래는 즐겁고' 등으로 현재까지 즐겨불리는 외국 동요를 비롯한 수많은 번역동요은 안병원의 청년시절 작품이다.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중간중간에 '헤이!'를 넣어 부르게 한 것도 그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현제명으로부터 사사할 정도로 음악에 푹 빠진 그는 1945년 해방이 된 두달 후인 10월 친구 권길상과 함께 '봉선화 동요회'를 만들었다. 이 동요회는 나중에 YMCA어린이합창단, 육군 및 해군 정훈어린이음악대, 중앙방송국 어린이 음악프로그램, 미국 순회 어린이음악사절단의 기틀이 된다.

그가 젊은 시절 음악인생을 살며 키워 냈거나 영향을 받으며 후에 음악인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대성한 인물들을 대략만 꼽아보면, 한동일(피아니스트), 이규도(성악인), 이화영(이화여대 교수), 신갑순(잡지 <삶과꿈> 발행인), 장영신(애경유지 회장), 김경순(이수성 전 국무총리 부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김자경, 이흥렬, 오현명, 이인범, 황병기 등 이름만 대면 금방 알 만한 음악가들과 한두 번씩 인연을 맺으며 한창 시절을 보냈다.

눈에 밟히는 윤이상 선생의 뒷모습

 안씨는 1993년 동경에서 열린 <한겨레 음악회>에서 40년 만에 윤이상 선생을 만났던 일을 회상하며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고 털어놨다.
 안씨는 1993년 동경에서 열린 <한겨레 음악회>에서 40년 만에 윤이상 선생을 만났던 일을 회상하며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고 털어놨다.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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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이 만나신 분들 가운데 윤이상 선생도 눈에 띕니다. 윤이상 선생님에 대한 기억 한토막을 듣고 싶습니다.

"윤이상 선생을 생각하면 늘 어둡게만 보이던 얼굴과 쓸쓸하게 느껴지던 뒷모습이 떠올라. 1953년쯤인가 한국작곡가협회 일로 종로의 다방에서 자주 뵈었지만, 이미 이름있는 음악가 선배여서 가까이 하지 못했어. 그러다 무려 40년만인 1993년 4월 동경에서 열린 <한겨레 음악회>에 참가했다가 같은 호텔에서 1주일쯤 지내게 되었어. 윤 선생은 남한의 음악계에 대해 매우 궁금해 했고, 고향을 무척 가고 싶어 했어. '다리가 너무 쑤시고 아픈데, 한국에 가 침을 맞으면 금방 나을 것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리던 모습이 눈에 밟혀. 참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 과거 언젠가 '안병원은 반정부 좌빨이다'는 비난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좌빨입니까?
"하하 참, 말도 안 되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철공장도 다니고, 편의점도 하고, 빵집도 열어 자식들 키우면서 사느라 정신 없이 지냈고, 종종 한국 초청으로 음악회에서 지휘 몇 번 한 것이 내 삶의 전부였어. 1988년과 1989년 두 차례나 북에서 초청장이 왔을 때도 '이산가족들도 가지 못하는 데 내가 무슨 낯으로 북한을 가나' 하고 사양했다고. 2001년에 북한에 갔을 때 북측에서 자기들 체제 찬양 발언을 슬며시 요청해 왔을 때도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서 못하겠다'고 했지."

- 지난 수년 간 종종 유화전을 열어 '북한어린이 돕기' 등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동기가 있나요?
"난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돕겠다는 것이었지. 2003년인가 서울 프레스센터 서울 갤러리에서 '안병원 북한아동돕기자선유화전'을 열었는데 모두 팔려 나가더라고. 바로 옆에서 국내 유명화가들이 현대미술전을 열었는데 거의 팔리지 않았어. 이걸 본 한 화가가 내 유화전을 보고 '뭔가 생각할 점이 많다'는 얘길 했다고 해. 그날도 내 유화전이 '빨갱이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며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기가 막히더라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65년 동안이나 부르다니"

 안병원씨 부부는 1990년 '남북 송년음악회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7차례나 불려진 것을 일생 최고의 감격적인 일로 회상했다.
 안병원씨 부부는 1990년 '남북 송년음악회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7차례나 불려진 것을 일생 최고의 감격적인 일로 회상했다.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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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 음악인으로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1990년 12월 서울에서 250여명의 남북음악인들이 함께 모여 남북송년음악회를 열었는데, 그때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 없어. 난 그때 청중석에 앉아 있었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이 자리에 우리 민족에게 귀중한 분이 왔다"며 나를 부르는 거야. 그래서 갑자기 단 위에 올라가 남북 음악인들을 세워 놓고 지휘를 했지. 청중석에서 재청이 거듭되고, 그래서 아예 뒤를 돌아서 청중들을 지휘했는데, 또 부르자고 난리를 치는 거야. 모두 일곱 차례나 불렀는데, 눈물바다를 이루었어. 행사가 끝나고 여기 저기서 몰려오더니 악수를 하고 부둥켜 안고. 아이고 그때 분위기로는 통일이 멀지 않은 것만 같았어. 누가 연출하라고 해도 그런 거 다시 못할 거야."

"(노선영씨가 다시 나서며) 북한 사람들이 이양반 손을 잡고 막 우는 거야. 그런데 이상도 하지. 나중에 들으니 데모를 하는데 '우리의 소원'을 부른다고 금지곡이 될 뻔 했다고 했다네요."

- 현재의 답답한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을 듯한데.
"이제 그만좀 했으면 좋겠어요. 남이나 북이나 너무 미워하고 너무 많이들 죽고 죽이고 그랬어요. 북한은 남쪽 적대시만 하지 말고 자존심 버리고 사정 털어놓고 도와달라는 얘기 왜 못하나. 남쪽도 그래 자신감이 생겼으니 좀 양보했으면 좋겠어. 서로 요구만 하지 말고 조금씩 양보하면 되지 않겠어? 양쪽 모두 잘 못하고 있는 거 같아."

- '우리의 소원' 말고 '안병원' 개인의 소원은 뭡니까.
"(이때 부인 노선영씨가 기다렸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참, 말도 안되고 부끄러운 일이에요. '우리의 소원'이 65년이나 불려지다니. 세상에 '우리의 소원이 통일'인 나라가 우리나라 밖에 또 어디 있나요?"
"(안병원씨가 끼어들며) 기막힌 일입니다. 제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흘러간 옛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어. 나의 마지막 소원은 통일이 되는 날 판문점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 합창을 지휘하는 것이야."

덧붙이는 글 |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에도 올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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