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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5일, 정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작년 한국의 전반적인 인권상황을 심사한 유엔인권이사회의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 결과 권고 받았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우리 정부가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두 차례 무산되었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전례를 볼 때, 정부가 진정성을 갖고 추진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국제사회 요구에 떠밀린 면피성 시늉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번에는 반드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우리 사회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사유로 발생하는 차별을 해소하는 첫걸음을 떼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 문제는 중요한 과제이다. 여성운동의 성과로 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성권한척도는 2009년 기준 109개 국 중 61위이다. 성격차지수는 135개국 중 108위,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장애인은 고용이나 이동권 등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데 사회적 제약이 여전히 심각하다. 특정한 사유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동안 다양한 시정과 인식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별에 관한 사회인식조사 결과에서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여전히 차별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배제와 폭력의 양상이 심각하다. 작년 11월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에서 마포구 일대에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명은 성소수자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게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포구청에서는 유해하고 혐오스러운 내용이라는 이유로 수정하지 않으면 현수막을 걸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서초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 시 에는 성소수자 인권보호 내용이 문제되어 조례제정이 무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성소수자'라는 사유가 사적 영역에서나 공적영역에서 정당한 이유나 논의과정 없이 유해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배제 될 수 있는 상황이 버젓이 발생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성별이나 장애는 물론 학력이나 학벌, 연령,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 출신지역, 가족관계 등 우리 사회 구성원 중 차별 사유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대상이 됨으로써 사회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일자리는 물론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배제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광범위한 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누구든지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의 확인이자 불합리한 차별을 경험하는 대다수 사회구성원의 평등한 삶을 살아갈 권리를 관행이나 제도의 측면에서 확고히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때문에 이찬진은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광범위한 차별의 관행을 불법이라 선언하고 그러한 사회적 권력관계가 차별받는 이에 대한 폭력이자 착취라는 이성적인 인식을 사회적으로 공인받고 실정법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차별과 관련된 각종 법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법은 20개의 차별사유에 대해 고용, 재화․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 등의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있고, 장애와 연령에 관해서 독자적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들은 차별의 범위나 구제수단이 협소하고 사유별로 규제의 정도가 달라지는 등의 문제점이 존재한다. 특히 차별이 성차별을 비롯한 다양한 사유가 복합적인 형태로 발생하고 있어 이를 포괄적으로 규율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2006년과 2011년에 이뤄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와 의견표명에 따르면, 발생가능한 모든 차별사유를 근거로 한 개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특정사유에 근거한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이 있더라도 일반적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차별의 다양성 반영 및 차별요소간의 수직화 방지, 다양한 차별사유에 대한 일관되고 통일된 법률 적용, 중복차별에 대한 적정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차별사유를 포괄하여 하나의 법률로 정하는 일반적․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바람직하다.

평등의 원칙은 기본권보장에 관한 우리 헌법의 핵심원리이다. 헌법 제11조 제1항은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교육기회의 균등, 여성근로자의 보호 및 부당한 차별의 금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의 양성평등과 같이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평등의 원칙을 특별히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가입, 비준하고 있는 유엔의 인권규약과 협약 역시 차별시정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유엔 사회권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국가별 정례인권검토 등에서 우리 사회에 모든 종류의 차별사유를 적시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따라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국제인권기준의 헌법의 실질화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기준의 국내이행이라는 측면에서도 시대적 과제이다.

올해로 3․8여성대회 한국여성대회가 29회를 맞는다. 우리의 구호는 여전히 '빈곤과 폭력 없는 세상으로'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적인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수적이다. 더구나 여성은 장애라는 이유로, 연령이 어리거나 많다는 이유로,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학력이 낮거나 높다는 이유로, 학벌이 좋이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했다는 복합적인 이유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있는 차별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형태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후진적인 차별사회와 결별하는 첫걸음이다.

덧붙이는 글 |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29회 한국여성대회 블로그 중복게재 (http://38women.co.kr)합니다. 글을 쓴 백미순 기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입니다.



태그:#여성의날, #한국성폭력상담소, #차별금지법제정,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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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창립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만들고 여성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연대를 이뤄나가는 전국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로 구성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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