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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권 교수의 유작 <남기고 싶은 말>의 겉표지
 임동권 교수의 유작 <남기고 싶은 말>의 겉표지
ⓒ 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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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생활이 가능하다면 이보다 멋지고 값진 삶은 없을 것입니다. 임동권 교수님의 유작 <남기고 싶은 말> 을 읽으면서 그런 삶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임동권 교수님의 유작 <남기고 싶은 말>(민속원 발행, 2013.1)은 나의 성장기, 나의 학계참여, 나의 대학교수 시절, 문화계 참여, 서로(스승, 선배)의 교분, 애경사의 교분, 민속학자의 인생떨이, 이런 일 저런 일, 장승 문화, 사제지간의 정 등 10장으로 되어 있고, 영면하신 뒤 월산 선생님을 생각하며가 덧붙여졌습니다.

임동권 교수님은 한국 민속학의 큰나무이자 선각자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오신 분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지난 해 11월 86세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일찍이 충청도 청양에서 출생하시어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유학을 가셔서 중학교를 마치셨습니다. 일제 징병을 피하여 귀향하신 뒤 고향 중석광산에서 징용되어 일을 하시다가 해방을 맞이하셨습니다.

해방 후 한국 문화에 뜻을 두시고 국학대학 국문학과를 다니시었습니다. 6.25를 맞이하여 귀향하여 지내시다가 고향 부근 예산 농고에서 국어를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 그 뒤 충남대학이나 국학대학에서 민속학을 강의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은 일찍이 문학 소년으로서 소설 창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시절 은사이신 방종현 선생님의 권유로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네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지만 민요는 아직 공부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시작해 보라는 은사님의 권유로 민요 채집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민요에서 시작된 교수님의 공부는 민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민요가 불리고 시작된 바탕으로서 서민들의 생활 민속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민속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공부뿐만 아니고 인재가 부족한 여러 대학의 학장이나 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진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임동권 교수님은 국학대학,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직접 한국민속학회를 만들어서 운영해 오시기도 했습니다. 학회의 발전과 민속학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 개인 돈을 사용하면서 해마다 학회지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민속학은 잔존문화 속에 남아있는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발굴하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고, 어떤 원리가 있는지 규명하는 학문입니다. 임동권 교수님은 민속 현상 가운데 민요를 비롯한 여러 민속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뜻을 밝히는 많은 책을 50여 권이나 쓰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저술은 당시 교수님의 선각자적인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해방, 6.25, 4.19, 5.16, 새마을 운동 등등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교수님께서 현장 조사를 통해서 찍어 놓으신 사진, 기록해 두신 자료, 저술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값을 지니고 있습니다.

임동권 교수님은 한국 민속학에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일본 민속학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말하라면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 1875.7-1862.8)를 든다고 합니다. 그 역시 일찍이 일본 생활 민속에 관심을 가지고 민속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많은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일본 사람 야나기다 쿠니오가 일본 민속학에서 뛰어난 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임동권 교수님은 한국 민속에 대한 자료수집, 정리, 발굴뿐만 아니라 한국대학에서 처음으로 민속학 강의를 개설하여 수업을 실시하여 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민속학회를 만들어서 연구 인력의 저변 확보와 민속학의 발전에 노력하셨습니다.

임동권 교수님은 한국 민속 자료의 가치를 일찍이 인식하시고 발굴과 보존 그리고 전승에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또한 한국 민속학 연구에 머물지 않고, 한국 주변의 중국, 일본 민속에 관심을 가지고 학자들의 교류, 이웃 나라의 민속 조사에도 적극 관심을 가졌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임동권 교수님께서 민속학의 자료수집, 연구, 교육, 학회활동, 사회 참여에 많은 활동을 하는 동안 늘 찬사와 칭찬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오해와 질타도 있었습니다. 무당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려 하자 기독교 신자인 위원들이 미신이라고 무시했고,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하려할 때는 노동력 감소를 염려하는 경제계의 질타를 들어야 했습니다.

초창기 선각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직 무지한 중생들이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시야가 좁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혜안을 가진 선각자들은 일을 추진하고 나중에야 중생들은 큰 스승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임동권 교수님 역시 민속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일부 오해와 비난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유작으로 남은 교수님의 저서는 그간 말하지 못한 당신의 속사정을 속 시원히 말하고 있습니다.

임동권 교수님은 그간 많은 저서와 연구 활동을 통해서 학자로서의 인품과 학문적 업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학회 운영이나 사회 활동을 통해서 한국 민속학을 확실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간 밝히지 못한 오해와 비난에 대해서도 유작을 통해서 속 시원히 밝히셨습니다.

교수님께서 더 오래 사시면서 더 많은 일을 하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만 운명은 인간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유작을 통해서 그간 못 다하신 말씀까지 듣게 되니 여한이 없습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덧붙이는 글 | 박현국 기자는 일본 류코쿠(Ryukoku, 龍谷)대학 국제문화학부에서 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기고 싶은 말

임동권 지음, 민속원(2013)


태그:#임동권, #남기고 싶은 말, #민속원, #류코쿠대학 국제문화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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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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