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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맘때였다. 고(故) 전몽각 선생님 댁에서 <윤미네 집> 초판본을 놓고 원본 필름을 찾는 일을 했다. 태어날 때부터 시집갈 때까지 26년 동안 딸 윤미를 카메라에 담았던 고 전몽각 선생님은 아마추어 사진가인 나의 롤모델이었고, <윤미네 집> 초판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인연이 있었는지 <윤미네 집>을 복간하는 일을 맡게 됐고, 사진집에 실리지 않았던 귀한 사진과 육필 원고를 가슴 앞에 놓고는 마냥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난다.

"눈을 뜨지 않은 갓난 아이. 젖을 맛있게 빠는 모습. 할아버지 댁 나들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 조그만 마당에서 노는 모습. 제 엄마와 형제들과 뒹구는 때. 집 근처 야산에서 들꽃이며 풀 사이를 헤집고 잠자리 나비를 쫓는 모습.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 가족이 함께 자전거 하이킹을 다닐 때. 아이들의 심통 부리는 얼굴. 방학 때면 집과 가까운 북한산을 오르고 가족 캠핑이니 썰매를 탈 때.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윤미의 혼인날을 받아두고... 그 모든 장면들은 너무나도 소중했었다. 아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자랑이요. 기쁨이었다." (<윤미네 집> 책머리에서)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첫눈 기다리며' 중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첫눈 기다리며' 중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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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모든 장면'이 소중했던 아빠는 집에만 오면 카메라를 곁에 두고 "아내에게 야단을 맞으며" 셔터를 눌렀다. 샘이 날 법한 딸의 데이트 장면까지 담고자 허락을 구하고 기어코 뒤를 따라갔던 아빠의 고집이 존경스러웠다. 분명 카메라를 들고 남자 친구와 함께 숲길을 걷는 딸을 조심스레 따라가는 아빠의 속마음은 아마 굉장히 쓰렸을 것이다.

만약 내 딸들이 데이트를 한다면 브라이언 밀스(영화 <테이큰>의 주인공)와 '맞짱'을 뜰 수 있는 아빠가 바로 나라는 사실(믿거나 말거나)을 남자 친구에게 먼저 일러둬야겠다(얘들아 꼭 기억해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 전몽각 선생님처럼 '쿨한 아빠'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딸의 데이트를 사진에 담기 위해 따라갔던 선생님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1989년 4월 윤미의 짧은 연애시절이었지만 그 행복한 한때를 기록하고 싶었다. 몇 미터 그들 뒤를 따르면서 나대로 사진을 찍을 테니 아빠를 의식하지 말 것, 평소대로 행동할 것 등을 약속하고 하루를 할애 받았는데 두 시간만인가 나는 먼저 돌아와 버렸다. 너무나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솔직하고 담백한 고3 엄마의 사진 일기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겉표지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겉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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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을 새로이 엮으며 '이런 사진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찾아 멀리 헤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기록해둬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가족과 친구, 내가 사는 마을, 그저 세월 따라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소소한 일상조차도 모두 사진에 담아둘 가치가 있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딸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피사체가 있을까.

엄마가 고3 수험생,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딸의 일상을 담은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오마이북)는 바로 '이런 사진책'이었다.

부모라면 겪게 될, 혹은 이미 지나간 그 1년은 아마 부모와 자식 사이 가장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기간일 게다. 아빠와 엄마는 지겹도록 "공부하라"고 다그칠 것이고, 아이는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런 시기에 카메라를 들고 아이를 담는 일은 '밀당'(밀고 당기기)의 연속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예를 들면 이제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딸에게 카메라만 들이대면 딸은 버럭 화부터 내고 얼굴을 가리기 바쁘다. 아주 기분이 좋거나 아빠와 흥정(?)할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카메라를 든 나는 우리집 아이들에게 공공의 적과 다름없다.

그런데 수시로 감정싸움을 해야 할 수험생 딸을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사진에 담는 일은 상상 이상의 공력이 필요한 일이었을 듯하다. 집·학교·학원을 거의 벗어날 수 없는 아이의 일상을 담담하고 꼼꼼하게 담았다. 책에 실리지 못한 '소중한' B컷들은 얼마나 될까.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입시 한가운데' 중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입시 한가운데' 중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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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3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땐 참 비딱했고 피곤했다. 시간을 비디오테이프처럼 빨리 돌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가 되면 과거는 잊기 마련. 우리 아이는 상처받지 않고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남들을 따라 하지 않고, 공부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자유롭게 키우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아무리 욕심을 버리고 싶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어쩌면 채영이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 얼굴을 볼 때마다 두 달도 남지 않은 수능시험일까지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여문 콩같이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채영이의 하루는 헐거웠다. 나는 무슨 원흉이라도 되는 듯 휴대폰을 아이에게 던졌다."(<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중)

"엄마는 사진을 하며 행복을 찾아갈까?"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하러 갈 일도 없고 친구와 놀이터에서 싸웠다고 씩씩거리며 돌아온 아이를 타이를 일도 없다. 아이의 얼굴을 볼 시간이 별로 없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한가롭다. 그러나 마음은 하루 종일 아이 곁을 맴돈다. 나는 고3 엄마다.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하러 갈 일도 없고 친구와 놀이터에서 싸웠다고 씩씩거리며 돌아온 아이를 타이를 일도 없다. 아이의 얼굴을 볼 시간이 별로 없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한가롭다. 그러나 마음은 하루 종일 아이 곁을 맴돈다. 나는 고3 엄마다.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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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를 읽으며 '예방주사를 맞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적·친구·외모·연애... 고3 여학생이 겪을 만한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우리집 큰 아이가 고3이 되려면 딱 8년이 남았으니, 그때는 지금보다 대한민국 공교육이 제자리에 서고 대학 입학 따위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내 마음처럼 이 세상이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잔소리가 쌓이고 가끔은 서로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때도 분명 있으리라. 또한, 악역을 맡고 싶지 않아 아내 뒤에 서서 무조건 아이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때가 돼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의 저자 소광숙씨처럼 아이와 대화하고 카메라를 들고 아이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다면, 고3 1년은 나나 아이나 나락처럼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 세월이 흐르면, 그때 찍은 사진들 놓고 이야기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채영이는 엄마의 사진 작업을 보며 다이어리에 이렇게 썼다. "엄마는 사진을 하며 행복을 찾아갈까?"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엄마의 죄' 중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엄마의 죄' 중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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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 너와 함께한 지난 1년여 시간이 행복했다고. 몇날 며칠 카메라에서 손을 놓고 있으면 네가 물었어. 잘되고 있느냐고. 좋은 날만 사진에 담으면 그게 무슨 이야기가 되겠느냐며 용기가 없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말해주는 네가 있어서 할 수 있었어. 네가 존재해서 할 수 있었고, 널 맘껏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할 수 있었어. 함께해서 행복했단다."(<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에필로그 중)

사진은 과거를 기록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가끔 마음의 상처를 꿰매기도 하고 닫힌 마음을 열게 만들기도 한다. "사진 찍는 일은 살을 비비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어쨌거나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를 읽으며 사진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김하게 됐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아무리 아내와 아이들이 외면하고 핍박해도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아이들과 있는 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사진밖에 없으니까. 네가 앞니를 뺐던 날도, 처음 혼자서 라면 끓여 먹던 날도 모두 담아뒀다. 세월이 흐르면 아빠가 멋진 사진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셰이크와 김밥' 중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셰이크와 김밥' 중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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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소광숙 | 오마이북 | 2012.09 |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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