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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어느 조회 시간에 한 친구가 담임 선생님에게 심하게 혼이 났다. 이유는 그 전날 국기를 내리는데 맞추어 애국가가 나가는데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어린애가 애국가가 흘러나오면서 태극기가 내려가는데 차렷 자세로 가슴에 손을 올리지 않고 그냥 운동장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눈물이 나도록 선생님에게 맞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가 왜 선생님에게 혼이 나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왜 매일 태극기 하강식을 하면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어 세워야 했는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엄동설한에 애국가 4절 부르던 초등생

학창 시절 이와 비슷한 기억들은 무수히 많다.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더워도 일주일에 몇 번씩 애국조회라는 것을 했다. 그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야 했다. 과연 그 땡볕에서 애국조회를 하던 초등학생들의 애국심이 높아지고, 애국가 4절을 부르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을까?

애국가나 태극기에 대한 불편한 기억은 학교 바깥에도 많았다. 극장에 가면 영화 상영 전에 애국가를 부르고, 대통령이 나오는 대한늬우스를 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왜 영화관에서 비장하게 애국가를 불러야했고 정권 홍보 방송을 시청해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군대에서는 어떠했는가? 일과를 마치고 내부반에서 쉬다가, 심지어 축구를 하다가도 저녁 6시가 되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국기 하강식을 하는데, 한참 축구공을 드리블을 해 가다가도, 막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에서도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차렷 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불렀다. 과연 축구를 멈춘 그 군인들의 가슴에 그 태극기가 애국심을 용솟음치게 만들었을까?

애국가에 대한 이런 우스꽝스러운 기억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듯하다. 지금도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가면 경기 시작 전 선수와 관중들이 애국가를 부른다. 가끔은 일부러 애국가를 부르기 위해 아주 유명한 가수나 연예인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축구나 야구 보러 간 관중들이 선수들과 함께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맞는 일인가?

웃기는 일은 이것 뿐이 아니다. MB정부 초창기인 2009년 행정안전부는 공무원노조에 공문을 보냈다. "공무원 노조 행사 때 '민중의례' 대신 '국민의례'를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애국가'를 불러야 하고,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 대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공무원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이 공무원의 품위를 손상해 공무원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비록 법원에서 징계 취소 결정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공무원들이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군사독재 정권에나 있을 법한 코메디 같은 일이 2010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국가 공식 행사에서 공무원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공무원들이 사적인 행사에서 대중가요를 부르든 민중가요를 부르든 무슨 상관인가? 이를 규제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당시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는 2009년 '희망과 대안' 창립 행사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면서 박원순 후보를 비판하고 나섰다. 박원순 후보는 당시 공직자도 아니었고, 또 '희망과 대안'이 민간인 단체인데도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태극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았다고 국가관이 어쩌고 하면서 공격한 것이다.

2009년 10월 있었던 이 창립 대회에서 대표의 인사말이 끝난 뒤 나이 지긋한 노인들과 보수단체 회원들이 "태극기가 없다, 애국가도 안 부른다" 등의 고함을 치며 소동을 벌여 결국 창립 행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후 극우단체들에 의해서 전교조나 전공노 행사, 6.15공동선언 행사 등에 대해서 끊임없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면서 민간인 행사들까지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공직자도 아닌 일반 국민인 민간인들에게까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에 대한 맹세를 하라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과연 이게 정상인가? 차라리 공직자들은 결혼식 할 때에도 축가 대신 애국가를 부르고, 결혼행진곡 대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틀어주라고 하지 그러냐는 비아냥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만약, 박지성 선수가 애국가 거부한다면?

지금 유로 2012 축구경기가 진행 중이다. 축구 강국으로 알려진 체코라는 나라는 한물 갔다는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번에도 8강에 진출했다. 이 체코 국가대표 선수 중에 토마스 로시츠키라는 선수가 있다. 그는 이번 유로 2012에서 체코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축구 팬이라면 체코라는 나라가 어디 붙었는지는 몰라도 파벨 네드베드, 밀란 바로시와 함께 로시츠키가 체코 사람이라는 것은 알 정도로 유명한 선수이다. 그는 축구 실력만큼뿐 아니라 국가 대항전에서도  국가(國歌)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이다. 국가를 부르는 날에는 경기에서 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시쳇말로 하자면 "애국가를 부르면 재수가 없어서 경기에 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미신'이고, 스포츠 용어로 하면 '징크스'이다.

'로시츠키는 애국심이 없다'는 일부의 비아냥에도 그는 "오래전부터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 이해해 달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고도 그는 이번에도 국가대표로 뽑혔고, 대표팀 주장까지 맡았으며 전 경기에 출전하여 맹활약하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축구 영웅 박지성 선수가 "애국가를 부르면 재수 없다"며 애국가 부르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가대표는커녕 아마 우리나라에서 축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로시츠키의 애국가 거부보다 더 유명한 것이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였던 카를로스 델가도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자치령인 푸에프토리코 출신의 강타자 카를로스 델가도는 사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카리브해의 섬나라인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130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473개의 홈런을 친 통산 30위의 강타자로 2038안타, 1512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 야구의 전설이 된 '양신 양준혁' 선수의 기록이 홈런 351개, 안타 2318개, 타점 1389개이다.)

9.11테러 사건 이후 전 미국을 휩쓸었던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 메이저리그도 7회가 끝나면 관중과 선수들이 '갓 블레스 어메리카'(God Bless America)를 불렀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선수 중 유일하게 그가 이 노래 부르기를 거부하였고 아예 덕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국의 국가(The Star-spangled banner)가 따로 있지만 이 노래는 미국의 제2의 애국가로 불리는 노래이다. 미국 관중들이 "유에스에이!"를 외치며 동참을 요구하는데도 "나는 9.11 테러 사건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침공은 역사상 가장 멍청한 전쟁이다"라며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끝까지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다른 나라도 운동 경기 시작 전에 우리나라처럼 관중과 선수들이 국가를 부를까? 알려진 것처럼 국가주의(nationalism) 전통이 강한 미국은 MLB, NFL 등 스포츠 경기에 앞서 국가를 부른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이런 나라는 거의 미국이 유일한 것 같다.

이승엽, 김태균 선수 등이 활약했고 현재 이대호 선수가 뛰고 있는 일본의 프로야구 경기에서 일본의 국가(기미가요)를 부르거나 국기(히노마루)에 대한 의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일본의 축구 리그인 J리그에서도 경기 시작 전에 이런 의식을 하지는 않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중계를 보아도 경기 전에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Queen' 대신 'EPL anthem'이라고 불리는 음악만 들린다. 또한 선수들이 입장할 때 홈 관중들을 중심으로 영국 국가 대신 각 구단별로 테마송 또는 응원가로 알려진 노래를 부른다. 예를 들면, 박지성이 뛰는 맨유는 "Glory Glory Man United" 또는 "Take me Home United Road", 리버풀은 "You'll Never Walk Alone", 첼시는 "Blue is the Colour" 등이다.

FIFA 킹 1위인 스페인의 라리가 역시 선수들이 입장할 때 관중을 중심으로 자기 응원하는 팀의 노래를 부르지 스페인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사실 스페인은 가사가 있는 애국가가 없다.) 세리에A라는 축구 리그를 운영하는 이탈리아 역시 국민에게 국가를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당연히 축구 하기 전에 이탈리아 국가 부르는 건 없다.

차범근과 손흥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의 분데스리가도 축구장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응원가를 어깨동무하고 열심히 부르지 독일 국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지는 않는다.

세계 모든 나라가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와 미국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가 대항전이 아니라면) 국내 운동 경기를 하기 전에 그 나라의 애국가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사회 분위기라면 야구장에서, 축구장에서 애국가 부르지 말자고 하면 간첩으로 낙인 찍힐 분위기이다. 정말 무섭다.

일본의 국가 제창 강요는 군국주의 부활, 우리나라는?

최근 일본에서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일본 국기를 향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사가 해고되거나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올해 1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은 "학교 입학·졸업식 때 일어나서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 처분을 하는 것은 재량권 내에 있는 적법한 처분"이라며 도쿄 공립고교 교직원 169명이 낸 소송을 기각했다.

일본 정부는 1999년 이미 국기·국가에 관한 법률에서 기미가요를 국가로 규정했고, 2008년 3월 28일 학습지도요령에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기미가요를 부르라"는 내용을 담아 학교에서 이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일본에게 반성하지 않는 군국주의의 부활 시도라면서 비판하고 있다. 하나도 틀림이 없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한 나라가 국가와 국기를 제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자유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도 애국가가 태극기를 국가와 국기로 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한 나라가 국기와 국가를 정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국민의 일상 생활에서까지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전체주의, 군국주의 문화인 것이 맞다. 우리로 치면 군사독재의 유물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합창과 매주 애국조회와 애국가 4절 합창 등의 어두운 군사독재 시절의 장면이 이를 증명한다. 사실 이런 면에서 진보정당 내에서 뜬금없이 애국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좀 이해되기 힘든 면이 있다. 진보 세력이 합의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진보 정당이 정당 내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을 가지고 논란을 벌이는 것이 도대체 진보의 가치와 맞는 것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애국가를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이 문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계 어느 나라가 정당 내부 행사에 그 나라 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제하는가? 거의 유일한 나라가 미국일텐데, 미국은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전당대회 등 정당 행사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는데 그렇다고 강제는 아니다.

일본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 다른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정당 내부 행사에서 자기 나라 국가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 대신 그 정당의 당가(當歌)를 부르거나 이것마저도 하지 않기도 한다.

오히려 과거 소련의 공산당이나 현재의 중국공산당, 북조선노동당, 베트남공산당 등은 지금도 정당 행사에서 그 나라의 국가를 연주한다. 이렇듯 정당 내부 행사에서 그 나라의 국가를 연주하거나 제창하는 것은 자유주의 국가의 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례이고, 전체주의 국가들의 잔재로 보인다.

정당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보호 받는 조직이고, 혈세 지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공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맞지만 엄연히 민간단체이다. 정당의 당원이 공직자가 아닌 것처럼 결코 국가 조직이 아니다. 그래서 정당의 행사에 반드시 애국가를 불러야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제하는 것은 '전체주의 과잉' 이외의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보인다.

애국가 안 부르면 감옥 가는 건 아닌지...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애국가 발언이 언론과 정치권에서 연일 비판받고 있다. 비보도를 전제로 한 발언의 맥락이나 진의 등은 보도되지도 않았고, 따질 것도 없다. 심상정, 박원석, 진중권 등 진보 진영에서 먼저 나서 거센 비난을 퍼붓고 있다. 물론 개인적 소신으로 이석기 의원의 발언을 비난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색깔론의 소재로, 또는 국가관의 검증 잣대로 삼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진보 정당내부에서조차 정당 내부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면 애국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국가를 부정하는 종북세력이라는 식의 논란이 벌어지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모든 정당 행사에서, 모든 민간단체 행사에서 애국가를 불러야 하고, 태극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받고 있다.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가는 바로 종북세력으로 몰려 매장을 당할 것 같은 숨 막히는 분위기이다.

조중동과 새누리당, 보수 단체들은 민주노총, 전교조, 전농 등 모든 운동 조직으로 애국가 논쟁을 확대하여 종북 세력이라고 몰아갈 것이 뻔하다. 이런 분위기라면 결혼식이나 장례식까지 태극기 달고 애국가 부른 후에 하라고 해도 아무도 반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가 애국가 결핍의 사회인지 과잉의 사회인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군사독재시대의 애국조회와 국기하강식 등으로 대표되는 '애국가 과잉'의 사회를 살아왔고, 지금도 그 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 행사에서 애국가 안 부르고, 태국기에 대한 맹세 안 하면 징계 뿐 아니라 형사처벌한다는 법을 만들까 걱정된다. 나는 현재의 애국가 논쟁이 너무 불편하다. 그것이 진보정당과 진보세력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짜증까지 난다. 나만 그런가?


태그:#애국가, #진보당, #로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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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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