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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에서 서쪽인 중문관광단지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돌 축대 위에 큼지막한 항아리가 줄줄이 놓인 집이 나온다. 제주 토종 장콩인 '푸른 독새기 콩'으로 장을 담그는 '한라산 청정촌'이다.

완전히 여물어도 살짝 연두빛이 도는 이 콩은 제주도 토종 품종으로, 장을 담그는 콩으로는 제주에서 최고로 쳤던 것이다. 본래의 단맛과 해풍에 영글면서 스며든 짠맛이 잘 어우러져 최고의 장맛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관행농법이 확대되면서, 생산 방법이 다소 까다로운 푸른 독새기 콩은 농가에서 자기네 식구가 먹을 장을 담글 정도로만 소량씩 경작을 해왔다. 흉작이 겹치면 씨앗을 찾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갈수록 상업화, 대량화하는 농업 생산 추세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었던 것.

한라산 청정촌에서는 지난 1997년부터 이 콩의 가치를 인식하고 '푸른콩'으로 브랜드화, 전통 장을 만들어 보급하는 사업을 해왔다. 태풍 피해를 고려해 한라산 동서로 분산하여 계약재배를 하고 직접 경작도 하는 한편, 씨앗 보존 및 확대에도 꾸준히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제주도 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콩이 되었고, '푸른콩'이란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멸종 위기에 놓여있던 종자, 제주도 '푸른콩'

어머니 양정옥씨의 뒤를 이어 지난 2003년부터 2대째 된장 사업을 하고 있는 박영희(43), 김민수(46) 부부가 반갑게 나와 맞는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 살다가 가업을 잇기 위해 고향 제주도로 내려온 두 부부는 올해 고2, 중2인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한라산 청정촌 김민수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희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한라산 청정촌 김민수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희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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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맞벌이를 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삶은 분명 아니다. 가진 것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세상에서 혹자는 이 부부의 선택을 이해 못 하겠다 할 것이고, 누군가는 대단한 사람들이라며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대답은 한마디로 '쿨'했다.

"그냥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가 97년도에 사업을 시작하셔서 지금까지 왔는데, 늙으신 부모님이 계속 하시기에는 점점 힘에 부치는 일들이 생겼어요. 그렇다고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요. 콩을 수매할 때부터 생산자와 줄다리기를 해야 하고, 브랜드화 해서 상품을 팔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해요. 관공서에서는 현금영수증 발행부터 수많은 자잘한 것들을 요구하고, 소비자는 더 나은 포장을 요구하고……. 그래서 저희가 나서게 된 것이지요."

'청정촌 며느리' 박영희씨는 2002년에 시부모님이 만드신 된장을 서울의 백화점 매장에서 직접 판매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백화점 판매를 하지 않는다. 힘은 힘대로 들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선 판매액 중 백화점에서 가져가는 마진이 너무 크다. 생산자에게 떨어지는 얼마 안 되는 수익도 고스란히 가져올 수가 없다.

백화점 세일 기간에는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내려야 하는데, 이것도 모두 생산자 부담이다. 매장에서 일하는 판촉사원의 월급, 사원 교육비 등도 물론 모두 생산자가 내야 한다. 지금도 이마트나 홈플러스 등에서 상설 매대를 열자고 연락이 오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있다.

제주 푸른콩 된장에 사용되는 토종 종자 '푸른 독새기 콩'. 콩나물콩보다 굵고 찰지다.
 제주 푸른콩 된장에 사용되는 토종 종자 '푸른 독새기 콩'. 콩나물콩보다 굵고 찰지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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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을 것과 파는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청정촌에서 파는 된장의 가격은 1kg에 1만3000원으로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저렴하다. 택배 주문을 하면 거기에 택배비가 추가된다. "원료비와 생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사실 더 올려야 되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는 수준"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엿기름과 누룩 등 부수적인 재료도 저희는 사다 쓰지 않고 직접 만들어요. 맛도 맛이지만 무엇보다 안전하기 때문이죠. 제품에는 최고로 비싼 종자만 씁니다. 이 재료들로 제사 음식도 만들고 저희 제품도 만들어요. 조상께 올릴 음식과 저희가 먹을 음식과 판매를 위한 음식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청정촌은 농촌진흥청에서 지정한 교육 농장이기도 하다. 장을 만들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전통 먹을거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 이 부부의 생각이다. 음식도 배워야 한다. 무엇이 좋은 음식인지 알아야 좋은 음식을 먹게 된다. 모르면 그냥 마트 진열대에서 가장 값싼 것을 집어 들게 되는 것이다. 먹는 사람의 건강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오직 더 높은 이윤을 위해 제조된 첨가물 범벅 제품들을. 

"교육을 하고 나면 아이들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박영희 대표는 말한다.

모든 교육은 사람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 제 손으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본 아이들은 그것에 친근감을 갖게 된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은 가르친 대로 흡수한다.

청정촌에서 된장 만들기 체험 학습을 마치고 적은 어린 학생들의 소감문.
 청정촌에서 된장 만들기 체험 학습을 마치고 적은 어린 학생들의 소감문.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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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된장 만드실 때는 냄새 난다고 짜증을 냈는데 앞으로는 같이 만들어야겠다.'
'된장이 유익한 균을 많이 가진 몸에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청정촌의 교육장 뒷면 벽에는 초등생들이 괴발개발 연필 글씨로 남긴 후기들이 올망졸망 붙어있다.

함께 장 만들어본 아이들 '된장은 좋은 것' 깨달아

"아이들이 연예인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하는 장신구를 따라서 사고 싶어 하잖아요. 만약에 된장을 만드는 사람이 할머니가 아니라 젊고 예쁜 사람들이라면 어떨까요? 된장은 늙은 할머니들이나 만드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아이들을 더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아요.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들이 젊고 멋진 것처럼, 젊은 선생님들이 더 많이 아이들 장 교육에 나선다면 훨씬 교육 효과가 클 것 같아요."

체험 교육에서는 주로 막장을 만든다. 막장은 막 만들어서 바로 먹는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즉석에서 콩을 삶아 으깨서 장을 만들면 한두 달 숙성 후 먹을 수 있다. 각자 만든 막장은 본인이 가져가도록 한다.

장의 원료는 콩과 소금, 그리고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보리가 전부다. 보리는 전통적으로 논농사가 불가능했던 제주도에서 주식으로 먹었던 작물이다. 제주도에서는 제사상에도 보리빵을 올릴 정도로 보리가 흔하다. 지자체에서는 이를 이용해 '제주 맥주' 사업을 띄우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라산 청정촌에서 만든 막장, 된장, 고추장(왼쪽부터 차례로).
 한라산 청정촌에서 만든 막장, 된장, 고추장(왼쪽부터 차례로).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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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보리만큼 흔한 음식이 바로 된장이다. 목 넘김이 어려운 보리밥과 함께 된장국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된장국은 찬물에 된장을 풀고 오이, 미역, 제피 등을 넣고 만든 냉국이다. 주변에 산이 없는 제주도에는 옛날부터 땔감이 부족했다. 군데군데 오름이 있지만 대부분 나무가 없는 초원이다. 물도 귀한 편이라 아무래도 수분 손실이 생기지 않도록 끓이지 않고 그냥 먹는 음식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옛말에 제주도 부자는 1년 내내 보리밥을 먹고, 중산층은 보리밥 6개월, 조밥 6개월, 가난한 사람은 1년 내내 조밥만 먹는다고 했대요. 조밥은 목에서 안 넘어가요. 위에서 소화가 안 돼서 조밥을 먹고는 돌아다니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요. 소설 임꺽정에 보면 청석골에 흉년이 들었을 때 두령들이 모여 앉아 누가 조밥을 먹을 것인가 결정하는 장면이 있어요. 조밥을 먹고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은 조밥을 먹고, 쌀이나 다른 잡곡은 조를 먹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양보하는 대목이죠."

장의 원료는 콩과 소금, 보리가 전부

청정촌을 꾸려가는 일은 녹록치 않다. 속이지 않고, 원칙을 지켜가며 사업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박 씨 부부가 이 일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 안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가치라는 것은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거잖아요. 이게 우리 전통과 역사가 있는 우리 콩이라고,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말해도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직 우리나라 소비자는 거기까지 못 왔어요. 음식의 질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보통은 그냥 '무농약' 마크 하나 보고 선택하고, 대부분은 더 싼 것, 기업이 대량 생산한 것들을 사고 말지요."

박 대표는 이제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 매대에서 나란히 경쟁하기보다 '우리만의 리그를 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는 가격을 비교하게 되니까 자연히 더 싼 것을 집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인데, 그 음식이 어떤 철학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재료가 쓰였는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런데 같은 소비자가 생협에 가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격을 따지기보다 음식의 질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리그가 달라지니까 생기는 현상이다.

돈으로 셀 수 없는 '가치'를 지키는 일

청정촌은 그동안 더 맛있고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노하우와 자료를 정리해서 내년에 국가에 명인 신청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토종 종자, 토종 된장, 전통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정촌 앞마당에 놓인 장 항아리들. 장을 발효시켰던 항아리들을 물로 여러번 우려내서 냄새를 뺀 다음 거꾸로 엎어서 일년간 쉬게 한다. 다음해 재사용을 위해서.
 청정촌 앞마당에 놓인 장 항아리들. 장을 발효시켰던 항아리들을 물로 여러번 우려내서 냄새를 뺀 다음 거꾸로 엎어서 일년간 쉬게 한다. 다음해 재사용을 위해서.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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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 나서니 비닐하우스 형태로 지어진 큼지막한 창고가 보인다. 장을 발효 중인 항아리들은 습도 조절을 위해 모두 창고 안에 들어가 있었다. 외부인은 가급적 출입금지다. 사람에게 균이 가장 많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면 장맛이 변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된장 생산량은 그때그때 다르다. 콩 수매가 원활할 때는 생산량이 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줄어드는 식이다. 청정촌에서 쓰는 제주 토종 푸른콩은 된장뿐 아니라 콩국수 등 다른 요리를 해도 맛이 있다. 콩에서 기본적으로 단맛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최고의 장맛을 내기 위해 언제나 매 단계에서는 최선을 다했어요. 때로는 잠도 안 자가면서……. 그런데 돌아서고 나면 잘 모르거나 서툴러서 모자란 부분도 있었죠. 제가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도움만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잘 하면 돈도 벌 수 있고요."

아이들이 3대째 가업을 잇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박 대표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일은 누구든 선택할 만한 일이에요. 시장이라는 것은 기다리면 오기도 하니까요. 저는 제 아이들이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도시에서 거대 조직의 부품이 되어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니까요. 이곳 제주도 청정촌에서 누군가가 먹을 푸른콩 전통 된장을 만들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은 사실상 세상을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착한 힘을 발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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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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