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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믿기 힘들겠지만 저는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서울시향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 정명훈)

"나는 한국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사람을 이편저편으로 가를 줄 모른다."(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

"정명훈 가만 놔둬라. 그만큼 잘났으면, 그 정도 받아도 된다. 예술가에게 굳이 정치적
입장을 물을 필요도, 그들에게 정치적 입장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평론가 진중권)

세 발언은 하나같이 예술에서 정치를 격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섣불리 답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다만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에게는 한사코 예술을 정치의 영역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신념을 대범하게 피력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점잖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투쟁을 위한 구호로 만들어진 말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들은 잘 모르고 있다.

물론 예술 중에서도 음악은 가장 순수한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는 유명한 말은 음악 특유의 순수성과 관련되어 있다. 당연히 음악에 정치적 의미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거나 투박한 성과 밖에는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음악가가 정치를 모른다고 말했다 한들 그를 탓할 것도 없으며 음악가에게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부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역사상 음악이 가진 이념 때문에 투옥된 작곡가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가가 순수한 것은 아니다. 사기나 치정과 같은 도덕적 문제로 투옥된 음악가는 의외로 많다.

잠복되었던 문제 다시 제기한 진은숙·중권 남매

어지간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명훈의 고액 연봉과 서울시향의 운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작가 김상수씨에 의해서였다. (관련기사: 정명훈과 진중권, 우리를 참담하게 만든다) 이후 나는 김상수씨가 다수의 보수언론과 클래식 애호가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도에 넘칠 정도로 격심한 비난을 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김상수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기주장을 연달아 소신껏 펼친다. 그러다가 그는 작년 12월 23일 <미디어 오늘>과의 인터뷰' 박원순 시장에게 묻는다, 정명훈 재계약이 최선이었나'를 끝으로 논의를 일단락 짓는 듯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이번에는 진은숙과 진중권 남매 측에서 다시 이 문제를 부각시켰다. 진은숙은 2월 4일, '정명훈과 서울시향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진은숙은 정명훈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지휘자이고, 정명훈에 대한 비판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정명훈과 자기는 다른 나라에 가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서울시향에 있는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에 앞서 1월 20일 진중권도 정명훈을 비호하고 김상수를 비난하는 글을 잡지에 게재한 바 있다.  

"김상수라는 이름의 연출가가 여러 진보매체를 오가며 집요하게 지휘자 정명훈을 물고 늘어졌다. 정명훈은 세계적 지휘자가 아닌데 과도한 연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지로 점철된 그의 글은 이미 여러 클래식 애호가들의 반박을 받아 한갓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그 얘기를 굳이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은 문제는 그가 정명훈을 물고 늘어지던 그 '정치적' 방식의 고약함에 대한 지적이다."('자유야, 자유!'<시네 21> 1월20일 자)

일단 잠잠해졌던 문제를 진은숙·진중권 남매가 새삼 다시 거론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확인해 보니 그동안 MBC <피디수첩>에서 이 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2월 7일 방영 예정으로 있었다고 한다.(방영은 MBC 파업으로 연기됨) 하지만 진은숙씨는 이 논의에 '남매가 공조했다'는 세간의 추측에 대해 '어이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비난만 말고 김상수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이런 사태를 지켜보는 나는 조금 혼란스럽고 의아스럽다. 진중권은 김상수가 무슨 주장을 했기에 '무지로 점철된 그의 글', '음악 애호가들의 반박을 받아 한갓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등의 조롱을 하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이 글 말고도 무려 80여 차례의 트위터를 통해 지면에 옮기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비난을 김상수에게 퍼부었다. 그의 누이 진은숙 역시 김상수 작가에게 '시간을 아껴 자기 창작에나 전념하라'고 충고하는 비례를 범하고 있다.

경위 파악에 도움이 되도록 김상수의 정명훈 비판 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개만 추려 본다.

1) 정명훈의 서울시향 운영은 이명박·오세훈의 토목공사식 성과주의의 적폐로서, 특히 정명훈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환희의 송가>를 지휘하고 난 후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헌정한 것은 정치적 행위다.

2) 정명훈에게 정액 연봉과 별도로 회당 지휘료 4200만 원, 심지어는 파리에 상주하는 직원  급여 분까지 매겨 20억 이상의 급여를 준 것은 편법이자 과다 특혜다.

3) 국악관현악단을 비롯한 서울시 산하 6개 문화예술단체의 총예산이 103억 원인데 비해 시향에만 131억을 책정한 것은 지나친 서양음악 우대다.

4) 서울시향은 1인지배체제의 구시대 운영 방식에서 탈피하여 현대적 개념의 오케스트라처럼 단원이 참여하는 민주적 운영체제로 개선되어야 한다.

5) 서울시향에 외국인 초빙 연주자가 15% 이상 되는 것은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

위 5개 항 중에서 정명훈 측의 사람들은 2 ~ 5항까지는 거의 반박을 하지 않는다. 개중에 진은숙은 5항을 걸어 독일 오케스트라에도 비독일인 연주자가 많이 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서울시향의 외국인 단원은 한국인 단원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지만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비독일인들은 독일인 단원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반박 역시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문제는 1항에 있다. 실제로 김상수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대부분 1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글의 앞에서 제기한 '예술과 정치'의 문제로 확대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술과 정치가 별개'라는 그들의 주장 자체를 부당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이에 앞서 짚어야 할 것은 '예술은 예술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그들의 허박한 주장이다. 이 주장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정작 '고액 연봉'이나 '과다 특혜'등은 예술과는 무관한 돈 문제, 정확히는 세금 사용 문제일 따름이다. 그들은 예술 문제가 아닌 것을 예술 문제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정말 우리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은 '예술가에게 정치적 잣대를 들이댄다든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정명훈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명박에게 지휘봉을 헌정한 것은 정치적인 행위인지 아닌지를 우선 밝혀야 하겠다. 두 사람의 글을 함께 제시한다.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에서 정명훈은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 <합창> <환희의 송가> 앞부분과 독창이 등장하는 부분을 짜깁기해서 지휘를 했다. (…) 정명훈은 음악을 지휘하던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활짝 웃음 띤 얼굴로 선물한다. 이튿날 대형 기득권 보수참칭(僭稱) 종이신문들은 일제히 '대한민국을 잘 지휘하라는 의미로 지휘봉을 준 것'이라고 해설했다."(김상수, <미디어오늘>, '정명훈은 왜 MB 취임식에 환희의 송가를 지휘했을까')

"이렇게 그는 정명훈을 졸지에 이명박의 부역자로 둔갑시킨다. 그런데 그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정명훈은 이례적으로 시향의 연주를 중단하고 관객과 함께 서거한 분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심지어 언젠가 김대중 국민회의 대표가 신당을 창당할 때 거기에 이름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우익의 김상수라면 이를 두고 정명훈은 전라도 빨갱이 정권의 하수인이라 부르지 않을까?"(진중권, <시네 21>, '자유, 자유!')

아이러니하게도 진중권은 정명훈이 '정치와는 무관한 예술가'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매우 정치적이었던 사례를 들며 김대중까지 물타기 식으로 동원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와 관점을 달리 한다. 일단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묵념을 올리는 것은 서울시향 종사자로서 당연한 만큼 정치와는 무관한 일이니 논외로 해야 한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할 때 정명훈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 그리고 2008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명박에게 지휘봉을 헌정한 것은 둘 다 명백히 정치적인 행위였다고 본다.

그때 보도에 의하면 정명훈은 1998년 당시 로마에 있었는데 자진해서 새천년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새천년민주당은 집권당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집권당이 한나라당으로 바뀌고 자기를 채용했던 서울시장이 대통령이 되어 취임을 하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환희의 송가>를 연주한 후 지휘봉을 헌정하는 방식의 이벤트를 연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말, 가장 정치적

청년 시절 나치당에 자원 입당한 카라얀은 늘 자기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진은숙은 '히틀러를 위해 연주한 푸르트뱅클러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친일 전력의 시인 서정주는 박정희 시절 저항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회' 가입을 요청 받았을 때 자기는 정치와는 무관한 예술가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훗날 전두환 지지 연설자가 되었다.

명석하고도 전위적인 시인이자 파시스트였던 에즈라 파운드가 전쟁 후 유죄판결을 받고 감금되어 있을 때 저명한 영국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는 그에게 권위 있는 볼링겐 상을 수여했다. 이로써 그들은 예술적인 판단은 정치로부터 상당히 독립되어 있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에 토마스 만이 나서서 말한다.

"그 위원회는 만약 에즈라 파운드가 파시스트가 아니고 공산주의자였어도 그에게 볼링겐 상을 수여했을 것인지 궁금해 할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예술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점이 유달리 강조될 때 기실은 가장 정치적일 수가 있는 법이다.


태그:#정명훈, #김상수, #진은숙, #진중권, #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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