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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왔다

지난 5일, 서울에서 두 시간 가량 차를 타고 달려간 충북 제천의 한 리조트. 그곳은 겨울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풍광으로 갈아입고, 바로 지금이 녹화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녹화를 위해 그곳에 온 수많은 스태프의 발바닥들은 무심하게도 하얗게 쌓인 눈을 분주히 지우고 있었다. 어림잡아 60~70명. 한 시간 방송을 위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화면 밖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문이 왔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 4일 SBS 토크 버라이어티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의 녹화를 마쳤다. 이날 문재인 이사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 4일 SBS 토크 버라이어티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의 녹화를 마쳤다. 이날 문재인 이사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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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주인공 문재인 변호사가 아내 김정숙씨와 함께 도착했다. 작가는 대본을 들고 문재인 곁에 딱 달라붙어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 설명했고, 문재인은 다 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드퀴즈의 진행 방법을 설명할 땐 여유도 부렸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뭐!" 카메라 앞에 서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 그것도 처음으로 예능에 출연하는 초짜 정치인이 저렇게 자신감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골랐다. 주위 사람들이 카메라 잘 받는 주황색 상의를 권했는데, 그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컬러라며 조금 쑥스러워했지만 못 이기는 척 그 옷을 입었다. 그때 MC 중 한 명인 김제동씨가 인사를 왔다.

그는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서게 한 사람이다. 문재인에겐 이날의 가장 큰 응원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작은 눈을 크게 뜨며, "오늘 날카로운 질문 많이 날릴 겁니다, 저 믿지 마세요!"하면서 좌중에 웃음을 선물했다. 문재인 변호사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섬세한 배려라 느꼈다. 

감이 왔다

녹화가 시작됐다. 첫 장면은 눈 쌓인 나무들을 배경으로 한 야외촬영이었다. 추웠다. 하지만 과연 긴장하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추운 줄도 몰랐다. '뜨거운 감자'를 들고 오프닝 멘트를 하던 이경규씨가 마침내 문재인을 소개했고, 이날의 뜨거운 감자,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 문재인이 숲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카메라 앞에 섰다.

자연스러운 웃음. 나는 그 웃음 뒤에 감춘 긴장감을 찾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한 시간 가량 계속된 이 야외녹화 내내 문재인은 여유 있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화했다. 재치 있는 대답으로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60년 동안 감춰져 있던 예능감이 비로소 때를 만난 것일까? 토크쇼 과외라도 받은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마음가짐, 그것이었다. 감추려하지 않고, 과장하려 하지 않고, 속이려하지 않으면, 즉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 저렇게 긴장감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녹화 끝까지 잘해낼 것이라는 감이 왔다.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그곳이 너무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이 났다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문재인편> 녹화현장. 공수부대 시절 경험을 살려 격파 시범을 보이려는 문재인 변호사.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문재인편> 녹화현장. 공수부대 시절 경험을 살려 격파 시범을 보이려는 문재인 변호사.
ⓒ 장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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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실내로 옮겨졌다. 본격적인 문재인의 '운명'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른 새벽 암표장사를 해보려고 어린 문재인을 데리고 부산역까지 갔던 엄마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끝내 일을 저지르지 못하고 돌아오면서 토마토 한입으로 허기를 달랬던 가난한 시절 이야기. 모범생이었을 것만 같은 그가 커닝, 술, 담배 때문에 네 번씩이나 정학을 당했던 정말 문제아였다는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군대에 첫 면회를 온 아내 김정숙씨가 통닭 대신 안개꽃을 한 아름 들고 와 고참과 동료들에게 난처했다는 순수하고 예쁜 사랑 이야기(이 장면에서 아내 김정숙씨가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몇 장의 사진으로 옮겨졌는데, 그 중 가장 관심을 끈 사진은 특전사 시절의 '폭풍간지' 사진과 식스팩 사진. 그 사진은 공수부대 낙하훈련 경험, 격파 경험 등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결국 문재인 앞에는 벽돌 한 장이 놓이게 된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문재인과 벽돌. 모두가 긴장했고 내 손에도 땀이 잡혔다.

그는 벽돌을 향해 힘껏 주먹을 던졌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벽돌. 실내엔 "아!"하는 탄식이 흘렀다. 그도 손이 많이 상했는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조금 말랑말랑한 벽돌을 준비하지 않은 제작진이 미웠다. 벽돌은 기왓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두 번의 시도 만에 기왓장 세 장이 한꺼번에 부서졌다. 뿌리는 파스를 연신 뿌려댔지만 손은 점점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는 괜찮다고 말하며 녹화를 계속 하자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틀 후 그는 결국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힘이 났다

이야기는 학생운동 하던 시절로 옮겨갔다. 5천여 명의 학생시위를 주동하고 제 발로 걸어가 경찰에 체포된 문재인. 그는 경찰에서 조사받고 검찰로 이송되는 날, 호송차에서 100원짜리 동전만한 작은 구멍으로 보았던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를 담담히 얘기했다.

바깥 풍경이 궁금해 그 구멍에 시선을 꽂았는데 엄마가 팔을 휘저으며 차 뒤를 따라 달려오는 모습이 그 구멍 속에 잡힌 것이다. "재인아! 재인아!" 이름을 부르면서.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그 장면. 그 장면을 듣던 작가와 피디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이 고요해졌다. 눈물이 눈에 고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재인의 운명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촬영스태프가 아니라 관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삶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작가들은 맨 앞에 앉아 MC들에게 다음 멘트를 적어주면서도 문재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웃고 울고 박수치면서 그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꾸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정말 힘이 세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벗이 왔다

 9일 방송된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문재인편> 녹화현장 모습.
 9일 방송된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문재인편> 녹화현장 모습.
ⓒ 장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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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의 만남. 운명이다. 그에겐 문제아, 왕수석, 폭풍간지 등의 여러 별명이 있지만 그는 '노무현의 그림자'라는 별명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게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함께 인권 변호사 하던 시절 이야기,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하던 이야기 그리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바로 그날, 운명 같은 벗을 먼저 보내야 했던 2009년 5월 23일 이야기...

그는 그날 읽었던 유서를 지금도 자신의 지갑 속에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만들었던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적힌 작은 명함과 함께. 한혜진씨가 그 유서를 다시 읽었다. 모두가 다시 숙연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했던 두 사람. 권력이 두 사람을 영원히 찢어놓았지만, 이 날만은 두 벗이 한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도 그 자리에 조용히 찾아와 벗의 이야기를 즐겁게 듣고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났다

하기 싫었던 정치, 정말 멀리 하고 싶었던 정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들었다. 한 마디로 책임감이었다. 참여정부가 다음 민주정부로 이어지지 못한 데에 대한 책임감. 거꾸로 가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여 대한민국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책임감.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조용히, 하지만 지닌 힘을 모두 쏟아 부어 그 책임감을 완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가난 때문에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는 자전거를 선물로 받고 녹화는 끝났다. 이제 봉하에서 노무현 대신 문재인이 자전거 타고 논두렁을 가로질러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여덟 시간 동안 계속된 녹화였지만 지루한 줄 몰랐다. 하나하나가 드라마 같은 그의 운명 이야기가 불과 한 시간으로 편집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한 편의 예능 프로그램 녹화를 구경했지만, 재미있는 예능과 감동적인 토크쇼, 두 개의 프로그램을 한 번에 본 느낌이었다. 늦은 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막힘없이 잘 뚫렸다. 초보 정치인 문재인의 앞길도 이렇게 잘 뚫리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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