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러분은 '교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최근 대형교회 목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기독자유민주당' 창당설이 터져 나오면서, 다시금 교회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유명 목사들의 막말, 폭언도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교회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았습니다. 당초 3편짜리로 기획했던 '교회 사용설명서'를 연장게재합니다. [편집자말]
 한 대형교회 설교 모습(자료사진)
 한 대형교회 설교 모습(자료사진)
ⓒ 엄지뉴스

관련사진보기


박재열 목사는 '작은 교회 살리기 운동'을 10년간이나 계속해왔다(<조선> 2011.7.29.). 무려 900개의 교회가 그동안 지원을 받았는데,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목사 부부는 '목회사관 훈련 서약'을 하고 매달 그 모임에 참여한다. 한데 그 서약 내용이 '목회사관'이라는 군대식 용어만큼이나 혹독하다. '성인 출석교인이 100명이 될 때까지 목사 부부는 휴일, 공유일, 명절에도 쉬지 않고 전도한다', '주 5일 이상, 매일 4시간 이상 전도한다' 등의 9개 항목이다. 한마디로 교회 성장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20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직할교회들(여의도순복음교회는 여의도의 '중앙성전'에 대하여 이 직할교회들을 '지성전'이라고 불렀는데, 2009년부터는 '제자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종속적 이미지를 완화하고자 했다)의 목회자들 앞에서 조용기 목사는 말했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마라. 목회에 실패한 이들이나 하는 변명이다. 주님 보기에 큰 교회가 아름답다."

한 사람은 '작은 교회가 살아야 한국기독교가 산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큰 교회가 아름답다'고 하여 정반대인 듯한 주장을 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이 두 사례는 공히 한국기독교의 지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즉 '성공지상주의'다. 작은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대형교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이고, 그렇지 못한 교회의 사역자는 실패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신자들을 붙잡기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과 모임들

'목회사관' 같은 목사들의 열정적인 전도에 힘입어 한국기독교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양적 팽창을 이룩했다. 1958년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의 달동네에서 다섯 명의 교인으로 시작해서 50여 년 만에 등록교인 78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룩한 조용기 목사의 열정이나 1982년 여섯 명의 교인들과 함께 창립하여 30년 만에 2000명의 중대형 교회를 이룩한 박재열 목사의 열정은 경의를 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로 그런 이들의 열정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축을 이룸으로써 한국기독교의 성공 신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후배 교회사역자들을 향하여 자신들과 같은 성공지상적 목회에 전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그런 신화의 주역이 된 자이거나 혹은 그런 신화를 동경하는 교회사역자들의 목회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매일매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혹은 길거리에서 전도를 한다. 열정적인 이들은, 박재열 목사가 요구한 서약문처럼 하루 몇 시간을 그렇게 한다. 물론 그런 전도에 대꾸라도 해주는 이는 열의 하나도 안 된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는 몇십 분의 일에 불과하다. 아무튼 발이 부어터지고 목이 다 쉬도록 전도를 해도 단 한 명을 교회로 불러오지 못한 날이 허다하다. 그렇게 몇날 며칠, 아니 몇 년을 고생하면서 수십 명의 교인들이 생겼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곤 다른 교회로 갈 수 있고 혹은 아예 기독교를 버릴 수 있다.

하여 그들을 교회에 충실한 신자로 만들기 위해 교인 만들기 프로그램을 돌려야 한다. 한국교회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교인들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 엮이게 하는 것이다. 집회의 수를 늘리는 게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새벽예배가 주 5~6회 열린다. 거기에 수요일 예배, 금요일 예배가 있다. 또 주일에는 최소 두 번의 예배가 있다. 그때마다 목사는 설교를 해야 한다. 요컨대 한 주에 9~10회의 설교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목사는 틈만 나면 교인들의 집을 방문한다. 그것을 공식화하면 '심방'이 된다. 물론 그때마다 약식 예배가 있으며, 목사는 늘 설교자가 된다. 거기에 때로는 청년회, 여신도회, 남신도회 등 연령별, 성별 모임이 있고, 때로는 직능별 모임이 조직되기도 한다. 여기에도 가끔씩 목사가 설교를 하게 된다. 또 애경사가 있다. 목사는 가능한 모든 애경사에 참여하고자 한다. 장례식은 최소 5회의 예배를 치른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예배가 있고 그 핵심에 설교가 있는데, 대부분 전임사역자가 도맡는다. 이 많은 모임들의 설교를 일일이 준비하기에는 절대시간이 부족하다. 한데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모임 자체를 성립되게 하는 것이다. 하여 기획에서 마무리까지 다 목사가 주관해서 준비한다. 게다가 교인들 간에 다툼이 있다거나 혹은 실의에 빠진 이가 있다거나 하면 목사는 중재자가 되고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교인관리에 집착하게 되는 '전담사역자'... 설교 준비는 태부족

그렇다면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게 될까. 많은 설교학 교과서들은 이른바 '주석설교'를 권한다. 한마디로 목회 현장보다는 성서 본문에 최대한 충실하라는 얘기다. 교과서적인 얘기를 하면, 해당 성서 본문을 가능하면 고전어(고대히브리어와 고대그리스어)로 읽고, 그런 능력이 없다면 최소 여러 번역본을 대조해서 보는 데서 시작한다. 다음으로 텍스트의 분석 작업에 돌입한다. 거기에는 사용된 단어들의 어휘적 맥락, 설교 텍스트의 문맥적 맥락, 그리고 텍스트 이면의 사회문화적 맥락 등을 복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사전과 주석서 및 해석서들, 그리고 그밖의 다양한 참고서들을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분석을 종합해서 텍스트를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그 해석이 설교자 자신과 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살피는 제2차 해석 작업을 함으로써 준비를 마친다.

그러나 이런 교과서적인 설교준비는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얘기다. 앞에서 보았듯이 목사가 해야 하는 설교 편수만도 엄청나서 일일이 준비할 여유가 없다. 다른 설교는 그냥 즉흥적인 순발력에 의존해서 치르고 제일 중요한 주일 대예배만을 준비한다고 하면 사정은 조금 나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뾰족한 대안이 못 된다. 한 주에 한 편을 충실히 준비하는 것도 만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교회전담사역자는 교회성장에 매진해서 빨리 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포교활동과 교인관리에 진이 빠지도록 집착한다. 간혹 시간이 나도 그 틈에 설교 준비를 할 마음의 여력이 생기지 않는다. 연구가 일상이며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도 한 주에 한 편의 글을 연중무휴로, 그이가 사임할 때까지 빠짐없이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살인적 과제다. 한데 목사는 연구에 익숙한 이도 아니고 글쓰기의 전문가도 아니다. 그런 이가 내용이나 형식에서 이렇다 할 흠이 없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거기에다 주석설교 같은 반현장적 텍스트주의가 교과서적 모범형이라니 목회 현장의 전문가인 목사로서는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다. 문제는 그이들이 신학자들, 특히 서양의 대가들이 제기한 설교학적 주장에 이견을 달만한 자존의식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현장의 특징보다는 교회의 오랜 전통의 무게가 더 심오한 유럽의 교회들, 특히 독일처럼 관념주의적 신앙전통이 뿌리 깊은 사회에서 국가 공무원인 목사들이 주석설교에 치중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고 그것을 권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서양의 목회현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한국사회에서, 더구나 목회 현장의 전문가이지만 텍스트 해석에는 초보적 수준도 못되는 목사들에게 주석설교라는 게 어떻게 설교의 모범형일 수 있을까. 더구나 참조하는 사전, 주석서, 해석서들은 서양의 맥락이 은연 중 반영되어 있어, 그것들을 비평적으로 읽어내지 않는 한, 현장과 주석 간의 괴리는 너무 큰 간격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목사들은, 서양의 목사들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함에도 서양의 학자들이 설교의 모범형으로 제시한 것에 반론을 펴는 데 주저한다. 그러면서도 마땅치 않으니 설교 준비에 더 손이 가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겠다.

'말의 종교'인 기독교 안에 제대로 된 설교는 드물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한데 문제는 개신교 목사에게 있어서 설교는 결코 소흘히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가톨릭은 고대에서 중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예배 제도의 대부분이 구축되었다. 교회 대중의 절대다수는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던 시대다. 이런 상황에 알맞은 예배제도 형태는 '제의'다. 해서 가톨릭의 예전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의 동작이나 복장, 전례의식에 사용된 도구에서 풍기는 향기와 소리 등이었다. 반면 사제의 강론 같은 직접적인 언어적 요소는 부차적인 요소로만 덧붙여 있을 뿐이다.

반면 개신교의 종교제도가 발전하던 시기는 문자언어가 빠르게 사람들의 삶의 영역으로 스며들던 때다. 문자는 귀족들의 범위를 넘어서 새로 부상하고 있던 시민계층의 사회형성 능력의 주요 수단의 하나로 활용되고 있었다. 마침 종이가 대량생산되고 있었고 활판인쇄기술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책의 부피가 작아졌고 저렴해졌다. 특히 팸플릿이나 전단지 같은 짧고 가벼운 문서들이 활발히 유통되기 시작했고, 국민언어로 번역된 성서는 예배제도의 형성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 가히 문자 혁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고, 그러한 문자문화의 사회적 변혁 요소는 교회제도에 중요하게 반영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의적 요소가 약화되고 '설교'라는 보다 직접적인 언어적 요소가 예배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요컨대 개신교는 제의의 종교가 아니라 '말의 종교'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독교의 예전적 전통 자체가 별로 없는데다, 급격한 격변의 풍랑에 휘말려 있는 사회였기에 전통적인 것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효율성 중심의 활용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탓이다. 해서 개신교 교도들은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간다고 생각하고 예배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설교는 그이들 신앙의 내용을 채우는 동력이었고, 그이들이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 갖는 자긍심의 요체였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내가 보기엔, 허구다. 실제로 교인들 대다수는 목사의 설교를 그다지 경청하지 않는다. 내 경험으로는 설교의 질도 이러한 사정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잘 경청하게 하는 설교는 초청된 이의 낯선 설교다. 또 가장 잘 경청하는 이는 그 교회에 새로 나온 낯설어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감을 설교를 들은 것으로 표현한다. 말의 종교이고 설교가 교회의 숱한 말들의 꽃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종교제도로 가득한 종교이기에 그러하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부분의 교회사역자들이 그렇게 확신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개신교 종교 제도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목사들은 누구든 설교 준비의 강박에 빠져 있다. 열심히 준비해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설교의 미미한 효과를 대체하는 온갖 활동들, 전도를 하고 교인의 충성도를 높이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교회에서 설교가 못하는 그 대체 활동들이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언저리에서 멀리 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다. 예배 등의 모임을 최대한 많이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니 강박에 빠져 있어도 준비할 틈이 없다. 또 짬을 내 준비를 하려 해도 그 시간에 집중을 못한다. 그러니 늘 부족할 수밖에.

알바·설교 보조자가 쓰는 설교문... '성공주의 위기'에 봉착한 교회

이러한 사정 탓에 한국기독교 출판시장에서 결코 사그라들 수 없는 코너는 '설교집' 코너다. 많은 목사들은 설교를 준비할 때,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다른 이의 설교를 참조한다. 직접 텍스트를 연구하기보다 남이 한 것을 자료로 쓰는 게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와중에서 표절이 난무한다. 조금 더 공을 들여 설교집 여러 개를 짜깁기해서 준비하는 이도 많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단의 교육담당 기구가 주도해서 연간 설교 가이드북을 만드는 경우도 흔하다. 말이 가이드북이지 실은 설교원고를 대신 만들어 제공해주는 책이다.

한데 여기서도 빈부격차는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이와 같이 하지만, 보다 큰 교회의 목사들은 설교 보조자를 고용한다. 초기에는 보조 사역자(부목사나 전도사 등)가 자료를 조사하거나 예화를 만드는 일, 심지어는 대신 원고를 쓰는 일을 떠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담임목사가 바쁘다면, 물리적인 시간이 더 없는 이는 보조 사역사일 것이다. 해서 등장한 것이 '알바'를 고용하는 것이다. 박사과정이나 석사과정의 학생들이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대부분의 교인들이 설교를 경청하지 않는 가운데 예배가 수행되고 있으니 까짓것 표절이면 어떻고 짜깁기면 어떤가, 또 용역을 쓰거나 대리집필을 통해 하는 것이면 어떤가. 어떻든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은 목사의 말이라고 믿으며 최선의 해석으로 응답할 것이고,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은 어떻게 준비한 것이든 그렇게 할 것이니 말이다. 또 비판하는 사람들은 어찌하든 비판할 것이 뻔한 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교인들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어떤 잡지 기획자가 설교비평이라는 장르를 기획해서 한 반골신학자로 하여금 집필하게 하자,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 또 꽤 많은 작은 교회들은 설교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예배 안으로 도입하여 수행한다.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 한다. 더 이상 듣기만 하는 수동적 수용자로만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진심과 열정, 그리고 그에 걸맞는 설교 준비가 뒷받침되지 않을 때 많은 교인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하고, 심지어 적극적이고 때로는 공개적으로 말을 한다. 이제 기독교가 터 잡고 있는 세계는 종이와 마이크로 대변되는 문자매체의 일방향성으로만 형성되는 사회가 아니다. 안에서 그 문제제기를 소통의 장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밖으로 표출되며 그것은 디지털매체를 타고 무한히 넓고 빠르게 움직이는 담론의 장에서 폭력적으로 소통된다.

이제 교회는 난관에 봉착했다. 한동안 성공지상주의를 통해 많은 성과물을 얻었던 교회가 바로 그것 때문에 위기에 봉착했다. 말의 종교인 개신교의 말이 너무 서투른 것이 들켰다. 그런데 그것을 개선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러 방법들이 신학교와 교단 차원에서 도모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근원이 성공지상주의와 직결되어 있는데,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성공지상주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총동원해야 하는 사회에서 말의 지성과 영성의 질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고, 말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제도화하지 않는 한, 말의 종교인 개신교 교회에서 수행되는 설교는 시간 때우기 용 말이거나 도구화된 허튼말 혹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진호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입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