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추진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강정마을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 폭염의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서울에서 왔고, 어떤 이는 프랑스에서 왔고, 또 어떤 이는 날 때부터 강정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평화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강정마을 찾은 이들을 '자발적 평화유배자'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강정마을로 자발적 평화유배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로 온 몸을 쇠사슬로 묶고 노숙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애자 민주노동당 제주도당위원장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현애자 위원장이 쇠사슬 노숙투쟁에 들어가며 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현애자 위원장이 쇠사슬 노숙투쟁에 들어가며 한 말이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온 몸에 쇠사슬을 감는다. 그것도 모자라 자물쇠를 철컥 채운다. 열쇠는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쓰러지듯 털썩 도로에 앉는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왜냐고 묻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떼어지지 않는다. 눈물을 꾸역꾸역 서너 번 삼키고서야 말이 터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려고 무자비한 공권력을 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그들은 결코 이 선을 넘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 사선을 긋고, 스스로 쇠사슬을 묶고, 말보다 눈물이 앞서는 '어린 딸의 엄마'. 현애자,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주노동당 제주도당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국에서 정치인이란 감정 없는 심각한 눈빛을 하고, 버릇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를 성경 외듯 하는 존재들이다. 그 뻔하디뻔한 정치적 언사를 한다고 해서 탓하는 이 아무도 없다.

'그렇게밖에' 하지 않았던 것이 정치한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부류의 종족을 기초의원부터 대통령까지 두루두루 봐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먼저 체념하는 것이 '정치소비자'의 미덕이 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엄마'란 이유 불문하고 '자식' 곁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다. 하물며 '내 강아지 새끼(오해하지 마시라, 섬마을 어미들은 귀한 자식을 이렇게 부른다)'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세상이 두 쪽 나는 사단이 벌어져도 '아이와 함께'였다면 모든 게 이해되고, 용서된다. 아마 이건 지구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사선을 긋고, 쇠사슬로 온몸을 칭칭 감은 채 좁은 농로 한가운데서 풍찬노숙을 하고 있다. 콘크리트 도로 바닥엔 얇은 돗자리를 깔고, 열사를 피하기 위해 어른 키 높이로 볕 가리개를 쳤다. 그것이 전부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생폼' 잡길 거부하고, 어린 아이의 어미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쇠사슬로 스스로를 묶고 풍찬노숙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 "강정마을에서 경찰 병력을 철수하라"는 것이다.

그는 "7월 24일 이후 경찰병력이 강정마을에 들어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은 무력으로 해군기지 공사강행을 하겠다고 정부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간주했다.

그의 말처럼 그가 쇠사슬을 묶고 도로에서 노숙투쟁을 시작하자 주민과 도민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처럼 그가 쇠사슬을 묶고 도로에서 노숙투쟁을 시작하자 주민과 도민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시간이 없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다"

강정마을 주민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제주도민들이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야5당(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창조한국당·국민참여당)이 진상조사 조사기간이라도 공사를 멈춰달라고 요구를 해도 정부와 해군은 쓰나미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공사를 몰아붙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없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해군기지 건설공사 현장에 접근하지 말라고 주민 70명을 상대를 소송을 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이 농로를 폐쇄조치하겠다고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습니다. 주민의 발을 잡고, 주민의 길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왜 서귀포 경찰서를 직접 다녀갔겠습니까. 한쪽에선 행정적 절차를 밟아가면서 경찰 병력 등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경찰청장이 다녀간 직후 바로 강정마을에 경찰 병력이 투입됐습니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으니까 고작 한다는 핑계가 '외부로부터 불법 시설물이 추가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경찰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묵살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경찰 병력 투입 등) 이런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왔다"고 했다. 국방부와 해군을 비롯한 정부가 초조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2010년 12월 27일 자로 삼성과 대림 등 건설업체를 앞세워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주민들 반발이 셉니다. 그리고 야5당은 진상조사단을 꾸려서 압박합니다. 그 와중에 해군이 무리하게 해상공사를 강행하다가 이를 항의하는 민간인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구요.

해군기지 반대여론은 갈수록 높아지고 이러다간 공사가 백지화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정치적 부담을 지더라도 빨리 강행해서 공사를 돌이킬 수 없는 정도까지 진척시키려고 하는 의도입니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서귀포 경찰서를 전격 방문하고 돌아간 뒤 제주도에선 '응원경찰'이란 말이 흉흉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응원경찰'은 4.3 당시 제주도에 들어와 잔혹한 학살행위를 자행했던 육지에서 온 경찰을 일컫는 말이다. 경찰이 육지병력까지 제주도로 추가로 파견한다는 정보가 돌면서 4.3의 공포가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4.3은 제주도민에겐 현재진행형 아픔이다. 특히 육지에서 온 병력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심리는 잔혹한 학살에 대한 제주도민의 발버둥이다.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단 깡패,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 육지에서 온 토벌부대. 이 같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제주도민에게 조현오 경찰청장은 들으란 듯이 "육지에서 추가병력을 지원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리고 경찰 병력이 강정마을에 들이닥쳤다.

"조 청장의 발언을 전해 들으면서 이 정부에겐 더 이상 호소식으로 해선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그렇지만 조 청장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제주도 주민들은 군사기지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습니다.

1987년에 모슬포에 공군 및 해군기지를 건설하려 했다가 전 도민적 항쟁에 직면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시도도 마찬가지였구요. 강정이라고 다를 것이라고 봤다면 오판한 것입니다. 제주도 그 어떤 곳이라도 군사기지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 도민들의 기본입장이에요. 지나온 역사를 보세요. 그런 시도는 하나같이 다 실패했습니다.

시작은 저 혼자일지 모르지만 보세요, 하루도 되지 않아서 주민들이 도민들이 쇠사슬을 함께 묶고 있잖아요. 저 혼자라면 어떻게든 끌어낼 수 있겠지만 저 많은 도민들을 어떻게 할 겁니까. 조 청장이 제주도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현애자 위원장 바쁘게 외부와 통화하고 있는 사이 함께 쇠사슬 투쟁에 들어간 주민들은 한 자원봉사자와 함께 타루 점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현애자 위원장 바쁘게 외부와 통화하고 있는 사이 함께 쇠사슬 투쟁에 들어간 주민들은 한 자원봉사자와 함께 타루 점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무엇이 그를 전봇대 위까지 끌어올리려 했을까

그는 제주도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며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육지에선 여섯 사람 건너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지만 제주도에선 두 사람이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면 바로 옆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것인데 그 정도로 연고관계가 친밀하고, 입으로 전해지는 말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그는 "내 한 몸이 수천, 수만이 될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제주라는 '섬 공동체'"라고 했다.

'쇠사슬 투쟁'에 들어가면서 그는 남편은 물론 가족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쇠사슬에 몸을 묶은 채 첫 밤을 새우려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늦어서 전화했어."
"강정마을 와서 봤더니 경찰이 많이 들어와서…."
"알았어."

초등학교 5학년인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며칠 집에 못 갈 것 같아."
"나 텔레비전에서 엄마 봤어."
"……."

몸이 아파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가 제주 농민운동의 씨앗을 틔운 그다. 대학 때는 문화운동을 하며 구로공단 일대를 '북 치고 장구 치며' 돌아다녔다. 어지간한 일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는, 눈물이 많다.

"이 위기만 넘어갈 수 있다면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몸에 쇠사슬 묶기 전날 이  곳에서 '저기로 올라갈까, 저기로 올라가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을까'하고 한참을 생각했어요."

그가 가리킨 그 곳은 전봇대 위였다. 그는 전봇대 위를 바라보다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그 위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를 전봇대 위까지 밀어올리려 했던 것일까.

"강정마을 주민들은 4년 동안 이 싸움을 하면서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입었어요. 그분들 얼굴이 한 분, 한 분 떠올라서 단 하루도 잊고 산 적이 없어요. 현장을 지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싶어 저는 그래도 정당인이니까 야5당 공조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했어요. 야5당 진상조사단이 꾸려지는 작은 밑거름이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것조차 의미가 없는, 무력화되는 상황이 돼버렸어요."

하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바로 이 때문에 이 싸움은 승리 한다"고 확신했다. "먼저 무력을 들이대는 이들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국민들이 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고맙다"고 인사했다. 각자 사는 일 때문에 바빴던 이들에게 제주도 강정마을에 이런 일이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고, 진실된 힘을 하나로 모아 저항하는 의지를 생기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언제쯤 스스로 묶은 쇠사슬을 풀 것인지 그는 기약하지 않았다. 그에게 몸에 묶은 쇠사슬을 언제 풀 것인지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제주를 칭칭 묶은 반(反)평화의 쇠사슬을, 강정을 옭아맨 낡은 군사주의 쇠사슬을 걷어내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신새벽 그를 묶은 쇠사슬엔 이슬 차디 차게 내릴 것이고, 이윽고 새날의 여명이 움틀 것이다. 그리고 새아침엔 쇠사슬 풀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그:#현애자, #강정마을, #해군기지, #제주도, #민주노동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